<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 알베르트 슈페어 지음·김기영 옮김, 마티 펴냄·3만7000원
최측근 중 유일하게 사형 면한 군수장관의 옥중 자서전
정치문외한이 히틀러에 빠진 뒤 건축적 이상을 대리하기까지
정치문외한이 히틀러에 빠진 뒤 건축적 이상을 대리하기까지
화가가 되기를 열망했던 청년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1907년과 1908년 잇달아 빈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에 낙방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20세기의 역사가 달라졌을까? 자신만만했던 히틀러는 첫해 시험에 떨어진 뒤 낙방 이유를 알고 싶어 아카데미 교장을 찾아갔다. “그림보다는 건축 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네.” 교장의 권고대로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중퇴자 히틀러에게 대학은 사실상 닫힌 문이었다. 훗날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퓌러(지도자)가 되고 제3제국의 총통이 되었을 때에야 그는 권력의 힘으로 젊은 날의 예술가적 이상을 펼쳐보일 수 있었다. ‘건축가’ 히틀러가 몽상에 가까운 꿈을 현실이라는 설계도 위에 그려낼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좌하고 그의 뜻을 이행한 사람이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다.
히틀러의 최측근이었고 제3제국의 건축가였으며 2차대전중 군수장관이었던 슈페어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형을 면한 사람이었다.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슈페어는 감옥 안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는 자서전을 집필했다.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뒤 그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그의 자서전은 제3제국의 최정점에서 활동했던 핵심 권력자의 첫 육필 증언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관심을 모았고, 히틀러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됐다. 이번에 번역된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가 히틀러 연구자들 사이에 빼놓은 수 없는 문헌이 된 그 자서전이다.
히틀러 체제의 대다수 참모들이 나치당 초기부터 히틀러와 동고동락했던 것과 달리, 슈페어는 뒤늦게 ‘지도자’를 알게 된 경우다. 부유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건축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슈페어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의 건축과 조교를 하고 있을 때 히틀러를 처음 보았다. 1931년 겨울 히틀러가 그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연 연설회에 별 생각 없이 갔던 것인데, 그것이 그 자신의 삶에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 보였던 수줍음이 사라지고 어느덧 음성이 높아졌다. 그는 다급한 듯 말했고,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연설 내용보다 훨씬 심오했다. 나는 그의 열정에 빨려들어갔다.”
슈페어는 자신이 히틀러를 만나기 전 <나의 투쟁>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나치운동은 물론이고 정치 일반에 문외한이었다고 말한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도 공감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매료된 것은 나치즘이 아니라 히틀러 개인이었다. 그는 히틀러 연설을 듣고 난 뒤 “마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우리는 이제 새 이상과 지식,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몇 주 뒤 그는 나치당 가입 신청서를 냈다. 1931년 12월 그는 47만4481번째 당원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당장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33년 1월30일 히틀러의 총리 취임 소식을 그는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최악의 경기침체로 일거리가 없었던 그는 베를린 나치당 관구 사무실을 개조하는 일에 참여했고, 그 일로 알게 된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자신의 관저를 수리하는 일을 맡겼다. 슈페어는 1933년 가을 베를린 총리관저를 개축할 때 조수로 보좌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히틀러의 눈에 들었다. 히틀러는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자네가 식사하는 동안 내 주의를 끌었네. 나는 나의 건설계획을 맡길 만한 건축가를 찾고 있었지. 젊은 친구를 원했는데 먼 미래까지 내다본 구상이었기 때문이었네. 내가 죽은 뒤에도 내가 부여한 권한으로 그 계획을 실현해줄 사람이 필요했어.”
28살의 젊은이는 일약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고, ‘지도자’의 건축적 이상을 따르는 일에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던졌다. “나는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찾은 것이다.” 1934년 부부동반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 히틀러는 슈페어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인의 남편께서는 나를 위해 지난 4000년 동안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건물을 세우려고 하십니다.” 1937년 ‘제국 수도 건설 총감독관’에 임명된 슈페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거대한 기념물들로 이루어진 수도 건설 계획을 입안했다. 기념비적 거대 건축물에 집착한 히틀러의 ‘파라오 컴플렉스’는, 슈페어의 증언을 빌리면, ‘세계지배를 향한 소망’의 미학적 발현이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슈페어가 파리에 독일 독수리상을 세우기 위해 제작한 모형을 히틀러에게 보여주고 있다. 위대한 시대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이라고 믿었던 히틀러는 자신의 ‘제국 수도 기획’을 슈페어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사진 마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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