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은 혁명, 1848> 볼프강 J 몸젠 지음. 최호근 옮김. 푸른역사 펴냄. 2만원
공화정 요구한 프랑스 시위
전유럽으로 파장 번졌으나
부르주아, 혁명 대신 개혁 원해
하층계급 버리고 귀족과 손잡아
전유럽으로 파장 번졌으나
부르주아, 혁명 대신 개혁 원해
하층계급 버리고 귀족과 손잡아
유럽의 19세기는 문자 그대로 ‘혁명의 시대’였다.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은 양대 분수령이었고, 1871년 ‘파리 코뮌’은 그 결정판이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앙시앙 레짐의 붕괴와 시민계급의 출현을 낳았다면, 19세기의 두 혁명은 역사를 돌이키려는 반동적 신성동맹 ‘빈 체제’에 조종을 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몸젠이 쓴 <원치 않은 혁명, 1848>은 ‘2월 혁명’을 보는 눈을 1848년 프랑스에서 이듬해까지의 전 유럽으로 확장한다. 1789년 당시의 시대정신이 봉건예속의 굴레를 끊는 ‘자유’였다면, 19세기 혁명이념의 정수는 ‘평등’이었다. 지은이는 “1848년 혁명은 유럽대륙의 전통적 국가질서가 파열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파열로 튕겨져나온 씨앗은 군주가 아닌 민주, 왕정(또는 제정) 체제가 아닌 공화제 이념의 실현과 확산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그런데 ‘원치 않은 혁명, 1848’이라니?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 그러니까 1830년 7월 혁명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8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보수적 왕조들로부터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것이었지만, 그 성공은 하층민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급속한 농업해체와 산업화의 물결은 무산자 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극한으로 몰아넣었고, 이들의 전방위적 개혁 요구는 이미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르주아는 급격한 변혁보다는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원했고,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사태를 두려워했다. ‘신분제 의회’를 고수하려는 부르주아의 태도는 하층계급의 분노를 샀다.
1848년 2월22일, 프랑스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보통선거권과 공화정을 요구하는 대중집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집회는 금지됐고, 대규모 항의시위가 겉잡을 수 없을만큼 폭발적 사태로 치달았다. 군대마저 시위대열에 합류하자 결국 ‘국민왕’ 루이 필립은 퇴위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승리였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도 바로 이 즈음 발표됐다. 일련의 장밋빛 개혁조치들도 가시화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새 공화정에서도 다수 대표자는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반쪽짜리 성공임에도 불구하고 2월 혁명의 파장은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주변국들은 ‘파리의 모범’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고, 부르주아는 사회불안과 무정부상태를 예방하는 것이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열린 국민집회에서는 자유주의적 요구 수준을 넘는 청원들이 쏟아졌고 시위는 무력충돌 양상을 띠었다. 이에 더해 ‘독일연방 강화’라는 시대적 기치가 맞물리면서, 뮌헨에서는 루드비히 1세가 퇴위했고, 프로이센의 루드비히 빌헬름 4세는 마침내 “프로이센의 소멸, 새로운 독일의 탄생”을 선언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도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잇달았고 무장시위대는 관공서를 습격했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봉건제도의 철폐 요구가 민족자치 및 독립국가 운동과 맞물렸다.
그러나 이 모든 민중혁명의 기운이 이미 경제적 토대를 장악한 부르주아계급의 이해관계를 극복할 만한 이념적·조직적·물리적 역량까지 갖춘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부르주아와 하층계급을 묶어주던 ‘민족의식’의 끈은 두 계급의 사회적 대립, 본질적 모순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부르주아계급이 결국은 전통적 지배계급이자 반혁명세력인 귀족계층과 손을 잡은 것이다.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은 공화정의 이념을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독일에서도 ‘제국헌법’ 제정을 위한 혁명적 봉기들이 이듬해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19세기 유럽 혁명은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1848/49 혁명’은 농민운동, 부르주아 입헌운동, 하층계급 시위, 민족운동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통일된 목적의식이 없는 네 개의 운동이 중첩되어 있었고, 여기서 비롯한 위기와 실패는 결국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졌다. 근대 서구의 시민권·자유권과 공화정 이념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확립되고 발전했음은 물론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1830년대 유럽 각지를 휩쓴 혁명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 ‘1848년 혁명’은 유럽대륙의 전통적 국가질서를 파열시켰다. 그 파열로 튕겨져나온 씨앗은 군주가 아닌 민주, 왕정(또는 제정) 체제가 아닌 공화제 이념의 실현과 확산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새 공화정의 다수 대표자는 더이상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차지했다.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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