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사냥꾼
소니아 샤 지음. 정해영 옮김. 마티 펴냄. 1만5000원
소니아 샤 지음. 정해영 옮김. 마티 펴냄. 1만5000원
동유럽·남미·아프리카 공짜약이라고 속이며 실험대상 삼는 거대 제약회사의 반윤리 폭로
우울해지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콜레스테롤이 높으면 운동 대신 강하제를 찾고 발기부전이 아니어도 기분전환용으로 비아그라를 선물하는 시대. 서랍을 열면 효용도 모를 약봉지가 이지러져 있을 만큼 약을 위한 약이 넘쳐나는 세상. 그 약봉지 뒤편에 보일락말락하게 쓰인 부작용 문구에서 혹여 약의 섬뜩한 탄생 과정을 보았는가. 시판되는 약은 하나같이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체를 실험하여 검증했다는걸, 수없이 실패한 약 가운데 용코로 살아남은 약이란걸. 설렘과 희망이 깃든 ‘신약’이라는 말은 이처럼 불경스럽고 음습한 ‘인체 실험’을 짝패로 달고 다닌다. 근데 ‘인체 실험’을 ‘임상 실험’으로 바꿔 부르면 윤리문제가 살짝 묻히는 게 사실이다. 이쯤에서 신약 개발은 인류 다수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위악쯤으로 봐줄까도 싶지만.
‘거대 제약회사의 추악한 얼굴’을 고발하는 <몸 사냥꾼>(마티 펴냄)을 펼치는 순간 순진한 생각은 싹 가신다. 제약업체의 이윤 놀음에 공중보건은 뒤틀리고 가난한 나라의 힘없는 사람들은 공짜약이라고 감지덕지 받았다가 ‘모르모트’로 죽어가는 잔혹사가 그려진다. 미국 남부 흑인들을 상대로 30년간 매독 실험을 자행하고 은폐한 사건, 장애아를 위한 ‘특별식단’이라고 속이고서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식사를 먹여 혈액을 채취한 실험, 아픈 환자들에게 의도적으로 간암 세포를 주사한 실험 등.
“눈이 있는 곳에서 스키를, 환자가 있는 곳에서 임상 실험을!” 기이한 카피를 내건 위탁계약연구기관(CRO)은 동유럽·남미·남아프리카공화국·인도 등 못사는 나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의뢰인인 제약업체의 요구에 따라 ‘실험 맞춤서비스’를 한다. 피험자를 모집하고 결과를 뽑아내 저명한 학술지 논문으로 엮어내기까지 한다. 이렇게 국외에서 행해지는 실험이 매년 1600건에 달한다. “가난해서 의약품에 접근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 약품을 실험하는 것은 자선행위”라는 속임수로 꼬이고 개도국 환자들은 자신이 실험 대상인 줄도 모른채 인체 사냥의 미끼를 덥썩 문다. 게다가 ‘위약(가짜약) 대조군 실험’의 특성상 환자 절반은 설탕으로 만들어진 위약을 투여받는데 무치료상태로 방치된 환자는 데이터의 정확도를 높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사실상 아무런 조처를 받지못한 대조군의 환자가 ‘죽어주면’ 오히려 투약효과가 증빙되니 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이 쏟아진건 당연한 일. 누구를 위한 신약인가.
대부분의 신약은 페니실린이나 인슐린과 같은 기적의 치료제가 아니다. 속내를 보면 인류 구원의 허울 뒤에 산업의 논리가 숨어 있다. 제약회사는 “병을 치료하는 약도 좋지만,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은 더 좋다”는 모토로 적당히 건강한 사람을 위한 ‘라이프 스타일 약’을 개발하는데 열을 올린다. 가난한 나라에 만연한 무거운 질병의 치료제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이를테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약이나 우울증을 개선하는 약, 혈압을 낮추는 약으로 인해 미국 노인층은 점점 건강해 지는데 반해 가난한 나라의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환자는 손도 못써보고 죽어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약회사는 이들 블록버스터(10억달러 이상 판매) 덕분에 막강한 돈줄로 의료계를 장악해 의사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의약 마케팅의 진실을 조사하려는 독립적인 연구자들도 ‘멸종 위기의 종족’으로 몰아냈다. 방위산업 못지않은 제약산업의 로비력은 한-미에프티에이(FTA)까지 뻗쳐 미국 정부는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든다.
법적 공방에 대비한듯 꼼꼼한 각주를 달아 탄탄한 펜의 힘을 보여준 갸냘픈 인상의 여성은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저널리스트로 기업체의 권력을 파헤쳐 호평을 받아왔다. 임상 실험의 희생양을 줄이려는 그의 제언은 이렇게 요약된다. △실험시 윤리선언을 준수할 것 △(위약이 아닌)기존의 약과 신약을 비교 실험해 위험성을 줄일 것 △실험의 혜택을 피험자가 갖도록 할 것.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인체 실험을 전제로 탄생하는 신약은 흔히 ‘기적의 치료제’를 연상시키지만 제약회사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다급한 약보다 건강한 사람이 약을 달고 살도록 하는 약을 개발하는 돈벌이에 더 목을 맨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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