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강명관 지음. 도서출판 길 펴냄. 1만3000원
강명관 지음. 도서출판 길 펴냄. 1만3000원
‘용재총화’ ‘농암잡지’ 등 잡설서 길어올린 세설 81편
논문쓰기의 괴로움 등 삶의 단면 고전의 바다서 건져
논문쓰기의 괴로움 등 삶의 단면 고전의 바다서 건져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에서 개똥이, 소똥이를 불러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를 들려주던 ‘옛글 읽어주는 남자’ 강명관 교수가 3년만에 ‘잡문’을 묶어냈다. 고전을 씨앗 삼은 ‘세설’ 81편에다 인문학의 위기와 대입 제도의 폐해, 편리에 젖은 도시적 삶의 단면을 뭉툭 잘라 담았다.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는 고전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짧은 단상 모음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책이다.
세상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 소소한 일상과 짝지어진 옛글은 고답과 거리가 멀다. 차라리 통통 튄다. 한문학을 경로로 문학과 역사와 사상사를 가로지르며 소통해온 이 인문학자(한문학자로 가두지 말길)의 대중적 글쓰기가 고전의 문턱을 낮춘 덕이다.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2001)와 같은 전작들에서 보이듯 이 책에서도 양반문화와 유교윤리에 비판적인 시각은 여전하다. 성리학 책을 몽땅 외운 조선 학자한테서는 이념에 지배된 지식인의 전형을 보고, 문화유산 답사로 찾은 강릉 선교장에서는 본채에서 호령했을 주인마님보다 행랑채의 노비를 떠올리는 데서 고전의 반성적 ‘독해’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눈으로 보면 열녀를 찬양하는 <삼강행실도>는 사람을 죽이는 책이며 윤리의 탈을 쓴 <소학>도 인간을 옭아매는 책이다.
저자는 인문학 중에서도 변방인 영역에서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글을 연다. (‘옛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란 글에서 ‘인간 억압’의 반대편에 서기 위해서라고 고백한다.) ‘민족문화의 보존’ 따위의 거창한 것에는 별 관심 없다는 그는 ‘거룩한’ 논문쓰기가 괴롭기 짝이 없다. 자연스레 ‘잡문 예찬론’으로 이어진다. “논문의 형식과 잡문의 형식은 다만 그릇일 뿐이다. … 그러니 나에게 잡문은 논문과 같다.” 문체와 격식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 맞은 논문의 기억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에헴’하는 문집보다 <용재총화> <농암잡지> <학강산필> <패림> 등 형식도 장르도 없는 잡설에서 깊고도 생생한 사색을 퍼 날라온 그는 남의 이야기에 각주를 달아야 하는 삶이 인문학자의 삶이냐고 되묻는다. 행간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학계의 풍토가 일면 읽힌다. 교수 아비도 못푸는 문제가 수두룩한 아들의 수능 언어 영역을 풀어보고는 “과거의 격식에 맞게 지은 글은 으뜸으로 추켜세우고, 격식에 벗어난 글은 물리쳐 버리는” 정약용의 한탄에 빗대본다. 교육문제 뿐만 아니라 부동산문제도 예나 지금이나 골칫덩이였던지 연암 박지원은 소수의 부자가 토지를 광점하는 세상을 탄식하며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둘 것을 제안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저자는 “연암의 대책이 실천되지 않은 이유와 오늘날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가 다를 것이 없다”고 씁쓸해 한다.
이처럼 요지경 세태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속도에 지친 긴장을 풀어주며 목소리를 낮추기도 한다. <허백당집>에 나온 게으름 귀신의 훈수는 귀차니스트들이 반길 말이다. “세상 사람의 부지런함은 화를 불러오는 근본이요, 그대의 게으름은 복을 받는 근원이야.” 부지런함의 근원은 돈과 권력을 좇는 욕망의 조정이라는 저자의 해몽이 흐뭇하다. 또 가을 북한산에 오른 조선후기 문장가 이옥의 명문은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먼 풍경을 바라보게 한다. “저녁의 산색은 단풍잎이 모두 술에 취해 아양을 떠는 것 같고, 아침의 산색은 마치 졸린 것처럼 비취색이 배어든다. 저녁의 물은 말이 내달리듯 빨리 흘러서 모래와 돌이 구르고, 아침의 물은 기가 있어 바위와 계곡이 비에 젖은 듯 촉촉하다.”
이밖에 조선시대의 일상을 보여주는 자잘한 에피소드가 읽는맛을 더한다. 용돈이 궁해서 과거 합격장을 팔아먹은 고종 이야기나 유배간 형 정약전에게 닷새에 한마리씩 개고기를 먹으라는 동생의 조언, 내 몸이 없어져야 비로소 끝이 날 거라는 이규보의 치통앓이, 자칭 냉면주의자인 저자가 들춰낸 냉면의 기록들을 훑다보면, 고전을 ‘마스터한’ 듯한 착각이 들지도.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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