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느린희망> 유재현 지음. 그린비 펴냄
때로는 단 한 장의 사진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것은 미덕이다. 굳이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아도 감동과 충격, 그리고 신선한 깨달음을 안겨주어서 그러하다. 성공작인지 여부는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느린 희망>이 노리는 바도 거기에 있는 듯하다. 이제는 세계사의 변방으로 밀려는 쿠바에서 지은이가 느낀 바를 압축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사진은 24쪽에 나오는 집 한 채다. 얼핏 보면, 산밑자락에 터를 잡은 쿠바판 오두막같다. 그런데 꼼꼼히 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전깃줄이 없는 것이다. 더 꼼꼼히 보면, 대신 태양열 전지판이 보인다. 한쪽 더 넘기면 이 사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더 정확히 보여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두메가 아니다. 버젓이 전봇대가 집 앞 저만큼 있는데도 그 문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책의 부제인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지속가능한 후퇴’로 평가해야 하는지는 전적으로 읽는이의 몫이다. 나는 단지, 그런 삶을 살만큼 알량한 ‘기득’을 털어버릴 용기가 있는지 반성했을 뿐이다.
178쪽에 있는 벽화는 예술과 정치의 함수관계를 드러낸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화라 할만한 화풍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데서는 작가의 역량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나 벽 한구석에 그린 체 게베라는 분명 관제풍(官製風)이다. 금기와 우상이 있는 곳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은이도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건 아무래도 예술가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며 투덜거린다. 194쪽의 사진은 이 나라가 결코 지상낙원일 리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발기라도 한 듯한 거대한 굴뚝에서 매연을 토해내고 있는 장면이 찍혀 있다. 아마도 니켈을 가공하는 공장인 듯한데, “당신들은 달러와 산업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나라이기를 포기할 셈인가”라는 지은이의 분노에 동의하게 된다.
272쪽의 사진은 생활속에 스며든 권태를 느끼게 한다. 손님의 얼굴은 우거지상이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것이다. 그런데 종업원으로 보이는 앳된 여인은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다. 글을 읽어보았더니, 국영식당이란다. 알 만하다. 그러니 체제경쟁에서 자꾸 밀려나는 것이겠지 싶다.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나온 171쪽 사진은 글을 읽어보아야 비로소 지은이가 이들을 찍은 이유를 알 수 있다. 할머니는 젊은 날 혁명전사로 이름을 날리고 근로영웅 표창도 받은 여걸이다. 그러나 아들은 행방불명되었고 며느리는 재가했다. 지금은 우리 돈 6000원의 연금으로 손녀를 키우고 있다. 혁명의 끝자락에서 궁핍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지은이는 끊임없이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는데, 나는 대체로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적 실험을 상징하는 사진을 주목하고 말았다. 왜 이토록 삐딱하게 책을 읽은 것일까 곱씹어 보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못마땅해서 그런 듯하다. 우리도 못해내는 것을 남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 무너져가는 체제를 힘겹게 버티는 쿠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감내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가능성을 오로지 우리 안에서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느린 희망’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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