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게>를 한낱 기행서로만 읽으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필력 좋기로 소문난 다치바나이지만, 그의 긴 글보다 스다 신타로의 사진 한 장이 훨씬 매력을 풍기기 때문이다. 장담하건대,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에게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다면, 그것은 다치바나의 글 때문이 아니라 스다의 사진 때문일 공산이 높다. 물론, 이 책에서 예의 다치바나의 특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토스를 배경으로 한 글을 읽다보면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 대목도 있다.
아토스에는 철저히 지키는 금기사항이 있는데, 여성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나귀가 교통수단으로 널리 쓰이는데, 이 금지사항 때문에 수컷만 있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만하다. 예외가 있어 혜택을 보는 것이 있으니, 고양이란다. 고양이 좋아하는 수도사가 늘어나다보니 암컷고양이 늘어나는 것만큼은 관용을 베푸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토스 가는 배가 출항하는 우라노폴리스 항에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앞에는 여성이 한발도 들여놓지 못하는 검은 옷의 수도사들의 세계가 있”는데, 항구의 해변가에는 “전세계에서 찾아온 젊은 여성들이 앞가슴을 거침없이 드러내놓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치바나다운 장점을 느낄만한 구석이 별로 없다. 그리스 초기 철학자들에 대한 설명은 다 아는 내용이라 지루한 설교로 들린다. 각별히 다치바나라면 이런 대목을 어떻게 처리할까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고 읽는이에게는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치바나가 일러준 독서법대로, 기대에 못미치는 책이니만치 과감하게 집어던져버리는 것이 나을까? 그건 아니다. 이 책을 기행서로 보지 말고, 여행에서 얻은 사색과 성찰의 기록으로 본다면 건질 것이 많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흔히 대립하는 개념쌍으로 여긴다. 그런데 신전을 여행하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폴론을 받드는 곳에서는 디오니소스도 반드시 모셨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아폴론은 관리하는 신전이 많아 바쁜지라 부재중 업무대행을 해준 신이 바로 디오니소스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보완하는 관계이니, 사람도 꼭 그렇다. 대뇌의 신피질이 지배하는 이성적인 면은 아폴론에 해당할 터이고, 구피질이 장악한 정서적인 면은 디오니소스에 비유된다. “양자의 마땅한 관계는 인간의 뇌에서도 공존과 보완이지 한쪽만의 일방적인 해방은 아”닌 것이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는 지모신 신앙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고대에는 섹스가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다.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행위였던 탓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성장하면서 섹스는 원죄의 씨앗이 되었다. 섹스에서 철저히 분리될수록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이 옳다고 판정할 수는 없으니, 성(聖)을 추구하거나 성(性)에 매료당하거나 둘다 인간본성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치바나는 말한다. “양자 사이의 올바른 절충을, 인간은 언제쯤이나 목도하게 될까.”
책의 부제가 ‘영원회귀의 바다’로 되어 있는데, 이를 ‘중용의 바다’로 바꾸면 맞겠다싶었다. 하긴, 에게는 중용의 바다일 수밖에 없으리라. 철학사 시간에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고갱이가 바로 중용이었다니, 더 말할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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