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전의 최고봉으로 꼽는 <춘향전>은 각종 예술 장르로 재생산돼 왔지만 정작 이야기구조의 저변에 깔린 민중의식은 간과되기 십상이다.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거나 판소리로 들어야 제맛인 까닭이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판 신데렐라? 기생 얘기의 원조?
이야기 저변엔 수령 횡포 맞선 왈짜들의 연대
조선 후기 변혁주체인 기층민 비판의식 집결
판소리로 들어야 민중예술의 세계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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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변혁주체인 기층민 비판의식 집결
판소리로 들어야 민중예술의 세계 제맛
고전 다시읽기/춘향전
<춘향전>은 열여섯 살 관기 춘향과 동갑내기 양반자제 이도령이 만나 사랑을 불태우고 결혼에 성공한다는 사랑 이야기다. 사랑을 이루려는 춘향이 현실과 대립하여 갈등을 빚는 과정은 춘향의 ‘말’과 무명 인물들의 막간극 및 삽입 문예양식들을 통해서 구조화되어 있다.
이 매력적인 고전은 그간에 영화를 비롯한 각종 예술장르로 무한히 재생산되어 왔다. 그 가운데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미국의 61개 도시에서 동시 상영된 바 있다. 한 두 해 전에는 어느 텔레비전 채널이 이 고전을 현대 드라마로 개작해서 젊은 층의 인기를 끌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이 작품을 우리나라 고전의 최고봉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도 정작 학생들에게 감상을 물어보면, 좋은 점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흔한 사랑 얘기 아닌가요?” “요즘 유행하는 기생 얘기의 원조죠?” “한국판 신데렐라 이야기라 할 수 있죠.” 고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취급되고 마는 걸까, 씁쓸하다.
<춘향전>의 주제에 대하여는 저항이나 사랑, 혹은 그 둘의 종합이란 견해와, 열(烈)과 인간 해방이란 두 주제가 표리를 이룬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 작품은 판소리 광대의 창본인 <춘향가>와 소설책으로 정착된 <춘향전>(사본·간본)의 두 형태로 전한다. 현재까지 90여종 이상의 이본들이 확인되었다. 이 작품군 전부를 편의상 <춘향전>이라고 부른다. <춘향전>은 신재효의 사설 개작 이후 주제 및 표현이 양반층 취향에 맞게 변모했다고 하지만, 주제사상은 이본들 사이에 그리 차이가 없다.
서사시·소설·희곡에서 주제사상을 구현하는 방식을 갈등구조라고 한다. <춘향전>의 갈등구조는 춘향이 주체이고 춘향·이도령·변학도가 삼각형을 이룬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본에 따른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춘향은 기생, 이도령은 책방도령(士人), 변학도는 수령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도령과 춘향의 결연담은 예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연애하고자 하는 청춘남녀의 갈망을 담고 있다. 그 소재는 중국소설이나 희곡의 기녀?사인 연애담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 소설 구조가 중국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왔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은 인간의 감정 가운데서 가장 사회적인 것으로서, 사랑 속에 역사 발전의 특성이 완전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춘향전>은 우리 역사의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생성되었다. 본래 중국문학에서 기녀·사인 연애담은 기녀가 신분갈등을 극복하여 애정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신분갈등을 극복하지 못하여 비극적 결말을 맺는 이야기의 두 계보를 이루었다. 전자는〈이왜전〉의 계보, 후자는〈곽소옥전〉의 계보이다. <춘향전>의 구조와 주제는 많은 면에서〈이왜전〉의 그것과 유사하다. 장안 기녀 이왜는 애정과 행복을 쟁취하는 여성으로, 자신을 ‘요전수(搖錢樹)’로 여기면서 애정을 가로막는 방해자인 기생어미(포주)에게 저항한다. 그런데〈이왜전〉계열의 중국 작품들은 기녀의 지향의식을 주제로 하면서도, 기녀가 지배계급의 가치관을 수용하여 열녀가 됨으로써만 행복할 수 있다고 보는 소극적인 의식을 담아내었다.
월매, 사랑 방해않고 춘향과 공조 이에 비해 <춘향전>은 춘향과 이도령의 결합에서 제기될 신분 문제를 애매하게 처리하였다. <춘향전>의 이른 시기 형태를 보여주는 만화본(晩華本) <춘향가>에서는, 춘향이 기적(妓籍)에서 이름이 빠지고 정렬부인의 품계를 받아 조상의 사당에 배알하는 식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기녀 출신의 여성이 정렬부인이 되고 양반의 정실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뒤의 <춘향전>은 기생이면서 기생이기를 거부한 춘향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곧, 춘향은 애정실현을 통하여 인간 주체성을 온전히 획득하려고 한다. 그녀를 방해하는 인물인 변학도는 관기인 춘향의 실질적 주인이었으므로, 변학도와 춘향의 신분 대립은 매우 심각하다. <춘향전>은 그 대립 관계를 전면적으로 다루어서, 기녀-사인-수령의 삼각 갈등구조를 강화시켰다. 이 갈등구조는 기녀·사인의 연애담을 다룬 중국의 소설이나 희곡이 주로 상인을 방해인물로 설정한 것과 전혀 다르다. <춘향전>은 수령의 횡포에 대한 하층민중의 저항의식을 담았기에, 패배하고 말 악역으로 수령을 등장시켰다. <춘향전>은 노비와 주인의 신분 대립을 근본문제로 제시하였으므로 기생과 기생어미 사이의 갈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춘향의 어미 월매는 천민이면서 모성애를 지닌 평범한 어머니로, 춘향의 성격은 월매의 생활체험을 전제로 하여 발전한다. 월매가 간혹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기생살이의 설움과 울분을 반영할 따름이다. 이 점은 중국의 소설이나 희곡에서 기생어미가 포주로서 여주인공의 애정성취를 방해하는 악역으로 설정된 것과 전혀 다르다. 춘향과 월매는 함께, 변학도로 형상화된 광포한 수령에게 저항한다. 그만큼 <춘향전>의 삼각 갈등구조에서 변학도는 민중의 울분이 집중되는 절대적 악의 형상이다. <춘향전>은 춘향의 ‘말’을 통해 지방수령의 횡포에 노출되어 있던 민중의 비판의식을 드러내었다. 신임 수령 변학도는 자신의 수청 명령을 거절한 춘향에게 두 가지 죄목으로 단죄한다. 군주의 대리인인 사또의 명령을 어긴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며, 천민 기생으로 양반에게 항거하는 것은 질서를 어기는 죄라고 했다. 이에 대해 춘향은, 남편 있는 여자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것은 유부녀를 범하는 죄악이자 혼인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맞선다. 조선후기의 향촌사회는 기층민이 변혁의 주체로서 등장하면서 구조상의 재편이 요청되었다. 하지만 중앙권력을 상징하는 수령은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분제에 근거한 규제 질서를 강화하였다. 일부 수령들은,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낱낱이 고발한 대로, 아전들과 결탁하여 개인적 탐욕을 채웠다. <춘향전>의 작가-작가군은 무능한 수령의 형상을 제시하고, 향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닌 비판의식을 집결시켰다. 춘향은 이도령을 사랑의 동반자로 지니지만, 농민과 왈짜 등 민중과도 연대하였다. 그 연대감은 말의 잔치를 통해 고조된다. 흔히 ‘치레·사설·타령’이라고 지칭되는 상투적 표현, 동일한 통사구조, 운율의 반복체계를 사용하여 수다스럽다. 춘향·이도령·방자·신관·신연하인 등의 복색사설과 신관·어사의 노정기는 독자나 청자로 하여금 극적 장면 속에 동참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언어유희는 중국의 고전 희곡이나 일본의 조루리(淨瑠璃)의 수법과 유사하되, 그것들보다 더욱 민중적이다. 치레·사설·타령…민중의 언어유희
춘향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힌다는 소문을 듣고 남원 사십 팔면의 왈짜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장면은 정말 흥겹다. 춘향의 고난이 가장 극도의 상태에 이른 대목인데도 말이다. 왈짜들은 청심환을 구해다가 아이 변과 생강즙에 타서 먹이고, 춘향이 뒤집어 쓴 칼의 머리를 함께 들고 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들은 옥 밖에서 온갖 노래를 부르고 언문책을 외우며, 노름도 한다. 왈짜가 <상여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서 민중과 춘향의 연대는 절정에 도달한다.
<춘향전>의 ‘말’은 울림 없는 독백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사상정서상의 연대에서 배어나왔기에, 그 말은 마력을 지닌다. 그래서 ??춘향전??은 텍스트를 소리 내서 읽거나 판소리로 들어야 맛이 난다. 주제사상이 무엇이라고 답안 고르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민중예술의 세계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춘항전
송성욱 풀어 옮김, 민음사 펴냄(2004)
쉬운 현대어로 풀이한 독본
춘향전
이가원 주, 태학사 펴냄(1995)
춘향전의 원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역주본.
춘향전의 탐구
정하영 지음, 집문당 펴냄(2003)
춘향전의 심층 이해를 위한 참고서.
춘향전 전집
김진영 엮음, 박이정 펴냄(1999)
춘향전 이본들의 집대성.
월매, 사랑 방해않고 춘향과 공조 이에 비해 <춘향전>은 춘향과 이도령의 결합에서 제기될 신분 문제를 애매하게 처리하였다. <춘향전>의 이른 시기 형태를 보여주는 만화본(晩華本) <춘향가>에서는, 춘향이 기적(妓籍)에서 이름이 빠지고 정렬부인의 품계를 받아 조상의 사당에 배알하는 식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기녀 출신의 여성이 정렬부인이 되고 양반의 정실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뒤의 <춘향전>은 기생이면서 기생이기를 거부한 춘향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곧, 춘향은 애정실현을 통하여 인간 주체성을 온전히 획득하려고 한다. 그녀를 방해하는 인물인 변학도는 관기인 춘향의 실질적 주인이었으므로, 변학도와 춘향의 신분 대립은 매우 심각하다. <춘향전>은 그 대립 관계를 전면적으로 다루어서, 기녀-사인-수령의 삼각 갈등구조를 강화시켰다. 이 갈등구조는 기녀·사인의 연애담을 다룬 중국의 소설이나 희곡이 주로 상인을 방해인물로 설정한 것과 전혀 다르다. <춘향전>은 수령의 횡포에 대한 하층민중의 저항의식을 담았기에, 패배하고 말 악역으로 수령을 등장시켰다. <춘향전>은 노비와 주인의 신분 대립을 근본문제로 제시하였으므로 기생과 기생어미 사이의 갈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춘향의 어미 월매는 천민이면서 모성애를 지닌 평범한 어머니로, 춘향의 성격은 월매의 생활체험을 전제로 하여 발전한다. 월매가 간혹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기생살이의 설움과 울분을 반영할 따름이다. 이 점은 중국의 소설이나 희곡에서 기생어미가 포주로서 여주인공의 애정성취를 방해하는 악역으로 설정된 것과 전혀 다르다. 춘향과 월매는 함께, 변학도로 형상화된 광포한 수령에게 저항한다. 그만큼 <춘향전>의 삼각 갈등구조에서 변학도는 민중의 울분이 집중되는 절대적 악의 형상이다. <춘향전>은 춘향의 ‘말’을 통해 지방수령의 횡포에 노출되어 있던 민중의 비판의식을 드러내었다. 신임 수령 변학도는 자신의 수청 명령을 거절한 춘향에게 두 가지 죄목으로 단죄한다. 군주의 대리인인 사또의 명령을 어긴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며, 천민 기생으로 양반에게 항거하는 것은 질서를 어기는 죄라고 했다. 이에 대해 춘향은, 남편 있는 여자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것은 유부녀를 범하는 죄악이자 혼인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맞선다. 조선후기의 향촌사회는 기층민이 변혁의 주체로서 등장하면서 구조상의 재편이 요청되었다. 하지만 중앙권력을 상징하는 수령은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분제에 근거한 규제 질서를 강화하였다. 일부 수령들은,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낱낱이 고발한 대로, 아전들과 결탁하여 개인적 탐욕을 채웠다. <춘향전>의 작가-작가군은 무능한 수령의 형상을 제시하고, 향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닌 비판의식을 집결시켰다. 춘향은 이도령을 사랑의 동반자로 지니지만, 농민과 왈짜 등 민중과도 연대하였다. 그 연대감은 말의 잔치를 통해 고조된다. 흔히 ‘치레·사설·타령’이라고 지칭되는 상투적 표현, 동일한 통사구조, 운율의 반복체계를 사용하여 수다스럽다. 춘향·이도령·방자·신관·신연하인 등의 복색사설과 신관·어사의 노정기는 독자나 청자로 하여금 극적 장면 속에 동참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언어유희는 중국의 고전 희곡이나 일본의 조루리(淨瑠璃)의 수법과 유사하되, 그것들보다 더욱 민중적이다. 치레·사설·타령…민중의 언어유희
심경호/고려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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