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을 새롭게 기획한 히트작 <마법 천자문>에 나오는 천자문을 새긴 비석. <천자문>은 세월을 초월해 어린이 학습 교재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늘의 원리·땅의 이치·사람의 도리 단 한권에 집약
짜임새 있는 구성과 빼어난 묘사력 겸비
하룻밤에 완성하곤 머리 하얗게 세어 ‘백수문’ 별칭
짜임새 있는 구성과 빼어난 묘사력 겸비
하룻밤에 완성하곤 머리 하얗게 세어 ‘백수문’ 별칭
고전 다시읽기/6세기 주흥사의 <천자문>
요즘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학습만화 <마법 천자문> 시리즈란다. <마법 천자문>(아울북)은 지난 2003년 첫 출간 이후 지금까지 500만 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완결편인 제20권이 나오면 판매 부수가 2천만 부를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니 대단하다.
그러면 출판계의 총체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성공한 이유는? 출판사 관계자에 따르면 “한자를 놀이도구로 만든 게 비결”이란다. 무턱대고 한자를 암기시키려는 다른 책들과 달리,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만화주인공들을 활용해서 “흥미를 끌 수 있는 맥락을 심어주는 식으로” 만든 것이 적중했다는 것.
그러면 조선시대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천자문>이다. 아니 삼국시대 백제의 왕인박사께서 <논어>와 함께 <천자문>을 일본에 전하셨다니, 동아시아 최고·최대·최장기 베스트셀러가 <천자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판이다. (덧붙어 해외수출 서적 제1호로 <천자문>을 삼아도 되겠다.)
그러면 <천자문>이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은? 무엇보다 이 책 한권이면 교양인으로서의 자격을 완비할 수 있을 만큼 각종 내용이 잘 갖춰진 ‘종합선물세트’라는 점을 들어야겠다. 1천자의 생활 한자에다 125가지 기본 문형, 그리고 자연과 지리, 역사 및 인물, 윤리와 철학, 게다가 정치원리와 사람됨의 조건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었다는 것.
즉 ‘하늘의 원리와 땅의 이치, 그리고 사람의 도리’가 단 한권에 집약된 것이 <천자문>이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베스트셀러의 조건은 동일하다. ‘콤팩트한 디자인과 풍부한 콘텐츠’, 이것이 결정적 요소가 되겠다. 40~50대들이 초등학교 시절 한 권쯤은 갖고 있었을 참고서의 왕, <동아전과>가 <천자문>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초장기 베스트셀러에는 아무래도 유사품이 나오게 마련. 왜 ‘초코파이 재판사건’이라고 있지 않던가. 오리온 ‘초코파이’가 워낙 잘 팔리다보니 그 본을 따서 모 제과에서 ‘초코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니까, 오리온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소송한 사건 말이다. 그 귀결은 어찌됐는지 모르겠으나, 베스트셀러에 유사품이 나도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터. <천자문> 역시 유사품이 판을 쳤다.
“하늘 천, 따 지”로 시작되는 원조 <천자문>은 6세기 중국 양(梁)나라 ‘주흥사’라는 이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걸 하룻밤 사이에 완성한 다음, 작가가 얼마나 에너지를 탕진했던지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책. 여하튼 그 뒤를 이어 <속 천자문>이 나오는가 하면, 또 다른 글자 일천 개를 뽑아 <서고 천자문(敍古千字文)>이라는 책도 나오게 된다. 중국에선 다양한 ‘이종 천자문’이 쏟아져 나왔는데, 전통시대 아동도서의 대명사가 ‘천자문’이었던 셈이다. 이 땅에서도 이곳의 실정에 맞게 개정한 다양한 천자문들이 선을 보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천자문의 체제를 본떠 만든 <유합(類合)>이라는 아동용 한자 학습서가 출간되었다. 서거정이 지었다고도 하는 이 책은 전체 21편에 1250자로 이뤄진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여기다 1500자를 더 보태 3천자로 된 <신증 유합>이 출간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천자문 유사품’은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兒學編)>이다. <아학편>은 책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 배워야할 책’이라는 뜻인데, 역시 1천자를 뽑아 문장을 구성한 것이니 원조 천자문의 체제를 그대로 빌린 것이다.
그 내용상 특점은 이 땅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한 것이다. 정약용은 “천자(千字)”라는 칼럼에서 <아학편>의 출간의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천자문> 내용이 이 땅 어린이들에게 너무 어렵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가령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는 첫 구절만 하더라도 그 속을 제대로 알려면 ‘우주론’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할 정도로 고난도의 내용이라는 것.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런 식이다. ‘하늘은 어둑하고, 땅은 노랗다’는 첫 구절은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고대 형이상학인 천명사상과 ‘세계의 중심인 중국 땅은 노랑색이다’라는 오행사상이 압축된 것이다. 그러니 예닐곱 살 먹은 아이들이 겉말로야 ‘하늘 천, 따 지’하면서 읽고 외우긴 하겠지만 그 속뜻까지 올바로 이해하긴 어렵다는 비판이다. 덧붙여 자연현상과 그에 대한 느낌이 한 구절 속에 막 섞여있어 어린이들이 갈피를 잡기 어렵다는 점도 비판의 또 한 근거다.
중국에도 조선에도 유사품 쏟아져
이런 비판을 바탕으로 <아학편>은 가까운 부모와 부부로부터 출발하여 주변의 인척관계 명칭을 거쳐 신체부위의 이름 그리고 계절과 기상현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출판시장(?)은 이 책을 외면하고 만다. 그의 훌륭한 아동 교육철학에도 불구하고 <아학편>이 <천자문>의 적수가 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보다 ‘내용이 재미없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즉 글자를 짜 맞추기에 신경을 쓰다 보니, 감칠맛 나는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원조 <천자문>은 좀 어려울지는 모르지만, 구성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짜여져 있다. 다음은 중국의 서울을 묘사하는 대목인데, 내용으로야 별 것이 없지만 그 문장의 맥락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번 보자.
“중국의 서울은 동과 서, 두 군데 있다네. 동경인 낙양은 북망산을 등으로 삼고 낙수를 바라보고 있으며, 서경인 장안은 위수를 위로 두고 경수를 움켜쥐듯 자리했다네.(배산임수라는 지리사상에 기초하여 먼 하늘에서 서울의 모습을 조감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어서 ‘카메라’는 서울 시내로 들어온다.) 대궐과 전각들은 굽이굽이 들어차 울울창창하고, 높은 누각과 궁전들은 새가 나는 듯, 말이 놀라는 듯 솟구쳐 있다네. (그리곤 카메라는 행인의 시점으로 길거리를 묘사한다.) 건물 벽은 온갖 동물과 식물들로 디자인하였고, 신선과 선경을 컬러풀하게 그려놓았구나. (드디어 카메라는 궁궐 안으로 들어와 그 내부를 묘사한다.) 신하들이 머무는 관사는 양 옆으로 나란히 누워있고, 임금님 집무실에는 눈부신 커튼이 두 기둥사이에 늘어져있네.”
정약용의 ‘아학편’ 재미없어 외면
서울의 전경과 그 내부를 마치 원근을 번갈아가며 사진 찍듯 묘사하면서도 각 장면이 부드럽게 연결되면서 손에 잡힐 듯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문학적이면서 생생하고 또 속도감있는 전개가 <천자문>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요인이다.
한편 이 책은 습자용 도서로서도 널리 활용되었다. 한자 문화권에는 글씨체에서 미학을 발견하고 또 글씨모양에서 마음가짐을 헤아리는 서도(書道)의 전통이 있다. 때문에 글쓰기는 인격수련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점에서도 <천자문>은 부응하였으니, 조선최고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의 필체를 본으로 삼은 <석봉 천자문>은 조선시대를 두고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건 최근까지도 지하철에서 ‘단돈 1000원으로 모시는’ 어엿한 상품이기도 했다.)
다만 한자와 한문을 배우는 가운데 중국의 문화와 지리, 역사와 인물을 선망하게 만들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모화사상’을 세뇌하는 점이 <천자문>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짜임새 있는 구성과 빼어난 묘사력, 그리고 풍부한 정보 등의 미덕은 이 책을 근 1500년 동안 동아시아의 베스트셀러로 군림하게 만든 힘이었다.
서평자 추천 도서
김성동 천자문
김성동 편저, 청년사 펴냄
(고운 우리말로 풀어 썼을 뿐 아니라, 100여 편의 관련 에세이도 함께 얻어 볼 수 있다.)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편저, 삼인 펴냄
(한자의 자형 분석을 통해 중화주의의 권력성이 <천자문> 속에 들어있음을 폭로하는 책.)
천자문
이민수 엮음, 혜원출판사 펴냄
(전통적 맥락으로 읽어내는 <천자문>. 옛 서당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푸근하다.)
“하늘 천, 따 지”로 시작되는 원조 <천자문>은 6세기 중국 양(梁)나라 ‘주흥사’라는 이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걸 하룻밤 사이에 완성한 다음, 작가가 얼마나 에너지를 탕진했던지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책. 여하튼 그 뒤를 이어 <속 천자문>이 나오는가 하면, 또 다른 글자 일천 개를 뽑아 <서고 천자문(敍古千字文)>이라는 책도 나오게 된다. 중국에선 다양한 ‘이종 천자문’이 쏟아져 나왔는데, 전통시대 아동도서의 대명사가 ‘천자문’이었던 셈이다. 이 땅에서도 이곳의 실정에 맞게 개정한 다양한 천자문들이 선을 보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천자문의 체제를 본떠 만든 <유합(類合)>이라는 아동용 한자 학습서가 출간되었다. 서거정이 지었다고도 하는 이 책은 전체 21편에 1250자로 이뤄진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여기다 1500자를 더 보태 3천자로 된 <신증 유합>이 출간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천자문 유사품’은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兒學編)>이다. <아학편>은 책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 배워야할 책’이라는 뜻인데, 역시 1천자를 뽑아 문장을 구성한 것이니 원조 천자문의 체제를 그대로 빌린 것이다.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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