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다시읽기/이기백 <한국사 신론>
오늘 6월2일은 우리시대 최고 역사가로 칭송받는 이기백 선생 2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의 대표작 <한국사신론>은 1961년 <국사신론>으로 처음 출간됐다가 1967년 <한국사신론>(일조각)으로 개정 출판됐다. 그 후 계속 증보를 거치며 100만부 가까이 팔렸을뿐만 아니라, 영어·일본어·중국어·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돼 국제적으로도 대표적 한국사 개설서로 통용되고 있다. 서평 전문지 <출판저널>은 1999년 새 천년에 즈음해 전문가 추천을 받아 ‘21세기에도 남을 20세기의 빛나는 책들’을 뽑았는데, 국내서적으로는 <한국사신론>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백은 식민주의사학을 탈피해 한국사학의 과학성을 정립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설정한 역사가다. 그는 식민주의사학을 한마디로 지리적 결정론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우리 주변의 중국·일본 등 강대국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적 운명이 결정됐다는 타율성이론을 특징으로 한다. 강대국을 섬기며 사는게 우리 민족성이라는 이른바 사대주의는 이 같은 타율성이론에서 비롯했다. 그는 사대주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 식민주의사학의 발명품이라고 했다. 사대와 사대주의는 구별돼야 한다. 사대가 외교정책 또는 특정상황에서 발생하는 역사적 사실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사대주의는 그런 사대를 역사의 법칙이거나 사상 또는 민족성으로 치부하는 식민주의사학이 만든 이데올로기다.
대표적 한국사 개설서로 세계 통용
해방 후 한국사학의 제일과제는 식민주의사학의 허구성을 밝혀 한국사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내재적 발전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요청은 민족주의사학을 한국사학의 가장 지배적 흐름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기백은 민족을 진리보다 앞선 가치로 해서는 한국사학의 과학성이 이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리를 배반한 민족은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마침내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를 그의 묘비명으로 할 것을 유언했다. 그는 역사를 민족의 역사로 환원하는 국사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평생 동안 기울였다. 그는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간 일본의 민족사학에 의해 식민주의사학이 만들어진 사실을 상기하면서, 민족사학과 식민주의사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주장했다.
민족사학-식민주의사학 동전 양면
<한국사신론> 여러 개정판들과 세계 각국 번역본(위). <한국사신론>은 1961년 처음 나온 뒤 세대를 초월하는 역사책으로 자리매김했다. ‘진리’란 가치를 중시했던 지은이 이기백 선생의 철학은 묘비명(아래)에 그대로 담겨 있다. 사진 일조각 제공
이기백이 지적했던 민족주의사학의 문제점은 한국사의 개별성을 특수성 내지는 고유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세계사적 보편성과의 연관성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사학은 “한국민족을 인류로부터 고립시키고 한국사를 세계사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이는 “결국은 민족의 우열론으로 기울어져서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자라나게 한 것과 같은 온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사학의 반대편에는 백남운으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사학이 있었다. 백남운은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법칙이라는 보편성에 입각해서 한국사를 이해했으며, 이러한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사연구의 기본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 유물사관의 도식에 입각해서 원시 씨족사회로부터 삼국시대 노예제사회, 신라통일기 이래 동양적 봉건사회 그리고 자기시대까지 이식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으로 한국사를 체계화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사적 보편법칙에 입각해서 일방적으로 한국사의 개체적 발전과정을 재단하는 것은 결코 역사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기백 선생의 주장이다.
그가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과학적 역사 연구방법론은 실증사학이다. 그는 실증사학을 과거의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생각되는 객관적 사실들을 하나의 실에 꿰서 연결을 지어주는 작업, 즉 체계화 작업”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역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로 서술돼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에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주도권을 쥐었던 지배세력이 누구였는가를 찾아내 그들을 중심으로 한국사의 전체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사신론>에서 신석기시대에는 씨족사회 구성원 전체가 지배세력이었다면, 신라시대에는 성골과 진골이란 골품이, 고려시대에는 호족이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그리고 마침내 근대에서는 민중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한국사 이야기의 플롯을 구성했다.
이런 한국사 체계화에 대한 비판은 그의 생전에 이미 제기됐다. 이에 대해 그는 평소 그답지 않게 겸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그러했듯이, 저자도 ‘10세기 뒤에 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고 어떤 역사가가 천년 뒤에도 평가 받을 수 있는 한국사 통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피력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사신론>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일컬었으며, 천년동안 읽힐 고전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나와 같은 사학사 연구자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난쟁이는 거인에 비할 바 없는 초라한 존재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서 거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기백이 20세 한국사학의 거인이라면, 그의 모습이 큰 만큼 그가 남긴 그림자 또한 길다. 나는 21세기 한국사학을 위하여 2가지 이유에서 이기백 실증사학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실증사학으로는 지금 우리가 국내외적으로 당면한 역사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 한국·일본·중국의 역사적 사실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학 현실이다.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우리가 아무리 시정을 요구해도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은 그것은 사실왜곡이 아니라 또 다른 역사해석이라는 것이다. 실증사학은 역사가가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만든다는 실제 작업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과거는 사라지고 없고, 남아 있는 것은 기억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분쟁은 사실과 해석의 관계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기억투쟁, 곧 특정 과거를 누가 어떤 기억으로 전유해 역사로서 공인하느냐를 둘러싼 투쟁으로 전개된다. 이런 역사의 담론적 투쟁에서 과거와 역사가 일치해야 한다는 실증사학의 진리론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실증사학의 이런 한계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으로 벌어졌던 역사의 내전에서도 그대로 재연됐다.
누구의 기억을 공인받느냐 관건
둘째, 21세기 한국사학은 망각된 역사공간인 동아시아를 재인식해야 한다. 식민지시대를 살았고 그 아픈 경험 속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식민주의사학 극복을 화두로 해서 한국사학의 독자적인 과학적 체계를 세우고자 했던 이기백은 동아시아사를 식민주의사학의 발로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도 그러해야 하는가? 페르낭 브로델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우리는 동아시아라는 감옥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살고 있다. 이제는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를 ‘기억의 장(場)’으로 하는 한국사인식이 요청된다. 이는 브로델이 지중해를 무대로 해서 성찰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한계에 대한 탐색이며 우리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다. 우리는 이렇게 이기백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그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야 한다.
서평자 추천 도서
한국사신론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1999), 1만5000원
(우리시대 최고의 한국사개론서)
우리역사의 여러 모습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1996), 9000원
(실감나게 읽을 수 있도록 분야별로 서술된 한국사)
민족과 역사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1971), 1만2000원
(이기백 역사학 정립을 위한 최초의 사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