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
심경호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 1만3000원.
심경호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 1만3000원.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 속 ‘낭만 선비들’ 교제의 미학 해학미·지적 유희 넘쳐나
“내가 떠날 날이 앞으로 며칠 안 남았네. 만리 멀리 떠날 여행 봇짐에 자네의 글이 없어서는 안되니 반드시 오언율시 여덟 수를 노자로 주게나. … 부디 게을러서 짓지 못한다고 회피하지 말기 바라네.”
허균(1569~1618)이 진주사 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권필(1569~1612)에게 이별의 시를 청한 ‘간찰’이다. 벗의 시를 에둘러 칭송하는 품이나 거절을 못하도록 ‘말 빗장’을 지르는 배포가 여간 이물 없지 않다.
“마침 동동주를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동이에 넘실대니, 즉시 오셔서 맛보시기 바라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
권필의 내방을 기다리는 허균의 또다른 ‘간찰’은 어떤가. 술을 핑계 삼은 지음지교에 멋스런 해학미가 넘친다. 입꼬리가 올라갔을 받는 이의 표정마저 삼삼하다. 주고받는 이의 내밀한 감정과 생생한 숨결이 느껴지는 ‘간찰’이란 죽간이나 목편에 쓴 편지를 말한다. 대개 한 자 정도 크기여서 ‘척독’이라고도 하며 비단이나 종이에 쓴 것까지 아우른다. 간찰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어 상투적 어휘로 예를 갖추기 마련이지만 위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격의까지 허문 듯 문체의 장력이 팽팽하다.
<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한얼미디어 펴냄)는 우정을 담은 간찰만을 골라 옛사람들의 교제의 미학을 엿본다. 고려시대 이규보 이제현 정몽주 등 3명과 조선시대 김시습 이황 이이 허균 정제두 이익 이덕무 박지원 김정희 등 24명과 그 친구들이 주인공이다. 저자인 심경호 교수(고려대 한문학과)는 우리 지성사의 핵을 그은 이들을 축으로 역사의 사각지대를 오밀조밀 엮어낸다. 그의 해박한 주해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발신자) 대 인물(수신자)’로 보는 역사의 관계망이 빽빽하게 그려진다. 어디까지나 시대의 아픔을 나누거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교유한 선비들의 마음을 따라갈 일, 문자메시지의 이모티콘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서신의 깊은 멋을 발견할 것이다.
“인생은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하기에 오늘은 모였지만 내일은 또 각각 어디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 이군이나 박환고와 함께 와서 마시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술이 며칠 되지 않아 바닥날 것이니, 늦게 오시면 물만 마시는 곤욕을 보게 될 겁니다.”
35살의 나이차를 잊고 맺은 ‘망년우’ 오세재(1133~?)를 먼저 보낸 이규보(1168~1241)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친구 전탄부에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며 술을 권한다.
옛 선비들이 음풍농월과 안분지족만을 읊진 않았다. 이이(1536~1584)는 “억만 백성이 물 새는 배에 타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할 책임이 실로 우리들에게 있습니다”라며 절친한 벗 송익필(1534~1599)에게 현실정치에서의 지식인의 몫을 환기시킨다. 경술국치가 있기 직전 황현(1855~1910)이 이건방(1861~1939)에게 보낸 간찰에는 우국지정이 사무친다. “세계가 날로 아지랑이 속에 빠진 듯 혼미해가니, 때때로 아주 잠들어버려 잠꼬대조차 하지 않았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 가슴을 치고 미친 듯 울부짖을 따름입니다.”
박지원(1737~1805)이 ‘책벌레’ 이덕무(1741~1793)에게 그의 수필집 <이목구심서>를 빌려 보려고 주고받은 간찰은 <산해경>의 문체를 패러디하는 지적 유희가 사뭇 ‘현대적’이다. 박지원이 세 번이나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이덕무는 마지못해 빌려주고는 바로 다음날 책을 찾아오려고 “귀와 눈은 바늘구멍 같고 입은 지렁이 구멍 같으며 마음은 개자만 하니, 대방가의 웃음을 자아낼 뿐이다”라는 간찰을 낸다. <이목구심서>를 풀이하면,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과 입과 마음으로 말하고 생각한 것을 모은 것. 말하자면 겸양을 드러낸 유머다. 이에 박지원은 “이 벌레의 이름은 뭔고”라고 응수한다. 체면치레를 벗어던진 익살에 훈훈한 인간미가 풍긴다. 간찰은 문학작품보다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사람만의 필적이나 종이의 결마저 ‘드라마’가 되기 때문이다. 글 뿐만 아니라 오가는 마음을 읽는 것도 간찰만의 맛이다.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박지원(1737~1805)이 ‘책벌레’ 이덕무(1741~1793)에게 그의 수필집 <이목구심서>를 빌려 보려고 주고받은 간찰은 <산해경>의 문체를 패러디하는 지적 유희가 사뭇 ‘현대적’이다. 박지원이 세 번이나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이덕무는 마지못해 빌려주고는 바로 다음날 책을 찾아오려고 “귀와 눈은 바늘구멍 같고 입은 지렁이 구멍 같으며 마음은 개자만 하니, 대방가의 웃음을 자아낼 뿐이다”라는 간찰을 낸다. <이목구심서>를 풀이하면,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과 입과 마음으로 말하고 생각한 것을 모은 것. 말하자면 겸양을 드러낸 유머다. 이에 박지원은 “이 벌레의 이름은 뭔고”라고 응수한다. 체면치레를 벗어던진 익살에 훈훈한 인간미가 풍긴다. 간찰은 문학작품보다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사람만의 필적이나 종이의 결마저 ‘드라마’가 되기 때문이다. 글 뿐만 아니라 오가는 마음을 읽는 것도 간찰만의 맛이다.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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