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국내에서도 개봉했던 영화 <왕의 춤>의 한 장면. 절대권력의 꿈을 발레에 실었던 프랑스왕 루이14세의 이야기를 그렸다. <문명화 과정>을 쓴 엘리아스는 당시 궁정예절은 귀족들에게 신분상승과 부를 미끼로 내걸어 길들이기 위해 도입된 것이며, 그 결과로 만들어진 구별짓기가 지금 우리 생활속 다양한 예의범절과 풍습으로 남아 작용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문명의 기원 ‘궁정사회’에서 찾은 엘리아스
경쟁 활용한 권력의 사회지배 전략 통찰
‘궁정예절’은 부와 신분상승을 보장하는 미끼
신흥귀족 너도나도 모방하면서 아래로 파급
새 행위규범 퍼지자 ‘문명’이라 일러
경쟁 활용한 권력의 사회지배 전략 통찰
‘궁정예절’은 부와 신분상승을 보장하는 미끼
신흥귀족 너도나도 모방하면서 아래로 파급
새 행위규범 퍼지자 ‘문명’이라 일러
고전 다시읽기/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 과정> 우리는 언제부터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고 잠자리를 감추게 되었을까? 우리가 몸의 청결상태를 유지하고 코를 풀 때 손수건을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한 그릇에서 모두 함께 음식을 퍼먹지 않고 각자의 식기와 식사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오늘날에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이 너무나 당연해서 질문하는 것조차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종종 소개되는 ‘그때를 아십니까’의 낡은 사진첩에서 벌거벗은 채 천진하게 웃고 있는 코흘리개 소년과 젖가슴을 드러낸 아낙네의 모습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우리 모두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런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근대적인 위생 관념이 발달한 덕분일까?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뜻밖에도 이 문제를 그도저도 아닌 권력의 탓으로 돌린다. 그것도 <문명화 과정>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책에서 말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의 태도의 변화와 권력이라는 생뚱맞은 두 주제의 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엘리아스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1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서구 문명의 운명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 젖은 전후 유럽의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패전의 절망 속에서 급속히 성장한 전체주의적 지배 권력이 모든 일상을 억압하던 독일의 상황에서 유대인으로서 그가 겪은 체험의 무게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1933년이라는 시점은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해 엘리아스는 루이 14세의 권력과 문화의 관계를 분석한 <궁정사회>를 교수자격 청구논문으로 완성했다. 그러나 그해 히틀러의 권력 장악과 더불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자 논문 제출 자격마저 박탈당한 그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망명지인 영국에서 엘리아스의 고뇌는 더욱 깊고 넓어진다. 인류사의 대재앙을 초래한 국가들은 왜 서구문명에서 출현했을까? 근대 서구문명은 어떻게 해서 세계의 지배자로 나서게 되었을까? 근대 서유럽 사회는 언제, 어떻게 문명의 상태에 도달했을까? 이런 문제의식은 일인 지배의 사회구조가 형성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침투해서 그들을 복종시키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의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복종의 심리학적 메카니즘이야말로 엘리아스 학문 세계의 화두이다. 1939년에 출판된 <문명화 과정>의 기발한 발상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복종의 심리학에서 ‘문명화…’ 탄생
이 책에서 그는 서유럽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본능적 욕구와 행위를 억제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정착하는 과정, 이른바 문명화 과정을 중세 말 이후 완만하게 진행된 근대국가 형성의 대서사시와 결합시킨다. 엘리아스의 설명은 아름답게 채색된 중세 기사도의 이면을 폭로한다. 성주 부인에게 시를 바치는 용맹하고 낭만적인 중세 기사는 무지막지한 칼잡이이며, 기사들이 모여 살던 대영주의 봉건궁정은 거칠고 야만적인 일상생활과 폭력이 난무하는 강도 소굴에 다름 아니다. 여성의 지위도 매우 불안정하다. 여성은 남성의 폭력에 종속된 채 남성의 육체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서서히 봉건 궁정의 규모가 커지면서 폭력 대신 공동생활을 위한 사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예절이 도입된다. 그러면서 여성의 사회적 비중도 커진다. 남성이 감정을 억제하고 자기통제를 통해 충동을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특히 높은 지위의 여성과의 관계에서다. 이렇게 보면 중세시대에 봉건영주의 궁정에서 기사들의 서정시와 여성숭배로 표출된 남녀관계는 일종의 사회적 게임이다. 거칠고 야만적인 기사들을 온순하게 길들이는 사회적 게임은 17세기 프랑스, 특히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절정에 달한다. 몇 년 전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왕의 춤>은 춤을 통한 사회적 역학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루이 14세는 무대 한 가운데서 춤을 춘다. 베르사유에서 왕은 ‘숨은 신’이 아니라 무대 연출자인 동시에 주연 배우이다. 기상의례에서 취침의례까지 엄격한 원칙과 위계에 따라 철저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궁정의 일상생활은 주인공인 왕과 조연이나 엑스트라인 귀족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연극 무대이다. 차별적인 상호의존관계망을 가시화하는 이 궁정예절은 ‘귀족 길들이기’의 덫이다. 그 덫에는 신분상승과 부를 보장하는 미끼가 걸려 있다. 귀족이 그토록 치욕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궁정예절에 순응하고 복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귀족은 그 미끼를 거머잡기 위해 기꺼이 예절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점차 그것을 놓고 치열한 경쟁과 질투를 벌인다. 이 경쟁과 질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궁정예절의 위계와 서열은 매순간 눈으로 확인되고 마음속에 각인되면서 순종적이며 우아한 귀족의 태도는 마침내 제2의 천성으로 굳어진다. 궁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존재 양식은 곧 궁정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다른 사회 계층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궁정에 출입하거나 거주하는 귀족은 전체 귀족 중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회적 위계의 정점에 위치한 궁정과 귀족들의 삶을 선망하고 동경한 신흥귀족과 부르주아의 모방과 전유를 통해 문명화 과정은 다양한 인간 그물망의 사닥다리를 타고 아래로 퍼져간다. 문명화 과정 자기 억압의 산물 궁정의 예절을 가로채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든 부르주아들은 18세기가 되면 사회개혁 의지와 결합하면서 ‘문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1760년 미라보의 저서에 처음 등장한 문명은 ‘미덕과 이성이 제자리를 찾음’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예절'(clvilte) 개념에서 파생된 ‘문명화된'(civilise)이 ‘불결한’ ‘거친’의 반대어이자 ‘길들여진’의 동의어로 쓰이고 여기에서 다시 문명(civilisation)이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엘리아스에 의하면 문명화란 부르주아 사회가 아니라 궁정사회의 산물이며 억압과 강요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세련된 지적 담론을 즐기며 현실 개혁을 논하던 계몽 사상가들은 권력의 감옥에 갇힌 우아한 궁정귀족의 후손이 아닌가. 절대주의와 계몽주의의 변증법이여! 궁정사회를 모체로 한 문명화 과정은 19세기에 놀라운 파급력을 보인다. 19세기에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이 전체적으로 향상되면서 서유럽 사회의 새로운 행위 규범이 널리 전파되고 유럽 전체는 점차 서구문명으로 통합되어간다. 지극히 제한된 공간인 궁정사회의 모델이 이렇듯 점점 더 넓은 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분석틀로 확대된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아스는 11, 12세기에서 18세기까지 수세기를 종횡무진하며 서유럽 사회의 변화를 설명한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엘리아스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운명이다. 그는 권력 독점을 토대로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최초의 ‘사회’인 궁정에서 경쟁과 긴장의 추동력이 일상적 사회관계를 통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포착한 다음, 이를 점점 더 커다란 역사의 동심원 속에서 시험해가며 고유한 유형으로 이론화한다. 엘리아스는 사회현상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 살아 있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관계 방정식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의 설명 방식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정치, 사회, 경제 등 복합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그 요인들의 작동방식은 간단치 않다. 궁정사회에서 포착된 권력의 사회 지배전략은 상호의존과 차별화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서로 뒤엉켜 끝없는 긴장과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구별 짓기는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끊임없는 압박과 불안을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윗사람과의 구별 짓기에 의해 아랫사람과의 구별 짓기가 정당화되면서 사회는 끝없는 사닥다리로 이어진다. 주거지, 의복, 행동 양식, 말투 등 삶의 모든 측면은 사회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존재의 대연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도 평등도 파고들 여지가 없다. 오직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을 맞추어가는 몸부림만 있을 뿐. 시종일관 서구의 문명화 과정에 비판적인 이 근대의 병리학자가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서로 같음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름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속성이 아닌가. 상호의존과 차별화 전략에 대한 통찰이야말로 문명화 이론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아닐까? 현대사회는 엄청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상호의존성이 확대되는가 하면 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뚜렷해짐에도 불구하고 더 모두가 기회균등의 이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엘리아스는 자본주의의 원리에 지배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의 기원을 궁정사회에서 찾은 것이다. 인간 자율성 회복하라
이영림/수원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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