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기 이탈리아 사상가 보테로
17세기 ‘국가이성 논쟁’ 부른 저작
마키아벨리의 사악한 교의 성토
종교-정치 조화 속에 숨은 아이러니
17세기 ‘국가이성 논쟁’ 부른 저작
마키아벨리의 사악한 교의 성토
종교-정치 조화 속에 숨은 아이러니
16세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조반니 보테로. 위키미디어 코먼스
조반니 보테로 지음, 곽차섭 옮김 l 아카넷 l 3만1000원 조반니 보테로(1544~1617)는 ‘국가이성’이라는 말을 퍼뜨린 근대 초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다. 보테로는 앞 시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정치사상을 논박하는 것을 자신의 이론적 입각점으로 삼았는데, 그 이론이 집약된 저작이 ‘국가이성론’(Della Ragion di Stato)이다. 근대 서구 정치 세계에 큰 영향을 준 보테로의 이 대표 저작이 마키아벨리 전문가 곽차섭 부산대 명예교수의 손을 거쳐 우리말로 나왔다. 보테로가 활동한 시기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대항종교개혁이 맞부딪치고 그 사이에서 절대군주제라는 초기 근대국가 체제가 등장하던 때였다.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 보테로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와 절대주의라는 정치가 조화를 이룰 길을 찾았다. 사보이아 공작령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15살 때 삼촌이 신부로 있던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예수회 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삼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로마대학으로 옮겼다. 이때 시작된 보테로의 긴 학업 시대는 파리-밀라노-파도바-제노바-토리노 등지의 예수회 학교를 옮겨 다니며 20년 가까이 계속됐다. 상급자의 권위주의를 견디지 못한 반항심 강한 성격이 유랑에 가까운 잦은 이동의 원인이 됐다. 보테로는 어렵사리 신학 과정을 마치고 예수회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36살 때(1580) 예수회를 떠났다. 그러나 라틴어 시작을 비롯한 뛰어난 지적 역량을 인정받아 밀라노의 카를로 보로메오 대주교에게 발탁됐고, 대주교가 죽고 난 뒤에는 카를로의 어린 사촌 페데리코 보로메오의 가정교사 겸 고문이 됐다. 페데리코는 1587년 추기경이 되고 1595년 밀라노 대주교가 됐는데, 이 시기에 보테로는 파리와 로마에 오래 체류하며 왕권과 종교가 갈등하던 당시 유럽의 정치 상황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 경험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해 1589년에 펴낸 책이 ‘국가이성론’이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곧 유럽의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17세기 ‘국가이성 논쟁’의 불을 지폈다. ‘국가이성’은 보테로 당대에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보테로는 이 말을 책의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국가이성을 독자적으로 논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 책은 서두에서 ‘국가이성이란 무엇인가’ 묻고 “영지(나라)를 창건하고 보존하며 확장하는 데 적합한 수단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한다. 이때의 ‘이성’(ragion)은 이성 말고도 ‘도리·이유·원리’ 따위 여러 의미를 품고 있는데, 보테로의 서술을 통해 이해해보면, 국가이성이란 ‘국가 통치 원리’ 혹은 ‘국가 통치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이성론’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과 원리를 두루 살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조세·통상·산업·사법·관료제도·도시계획 같은 문제에 관한 체계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데서 국가이성의 함의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사상사 차원에서 더 주목할 것은 이 책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반대하는 저작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책의 서문 격인 ‘헌정사’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를 “양심의 부재 위에 국가이성이라는 것을 세워놓은 불경스러운 저술가”라고 부른다. 또 그런 사람이 “국가의 경영과 통치에서 따라야 할 규범과 이상”을 제시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보테로의 비난대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위대한 일을 이룬 군주들은 신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활함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혼란케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라고 썼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의 ‘사악한’ 주장에 맞서 “군주는 교활성(astuzia, 계략)이 아니라 분별(prudenza, 신중함)을 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악한 국가이성에 선한 국가이성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보테로가 특히 반발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기독교 비판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기독교가 인간의 비천함을 강조하고 세속사에 대한 경멸을 가르쳐 국가를 쇠퇴의 길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맞서 보테로는 종교와 정치가 결코 적대적이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보테로의 반마키아벨리즘은 아이러니한 역전을 보여준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유용성’의 관점에 서서 종교적 미덕을 배제하듯이 보테로도 ‘정치적 유용성’의 관점에 서서 종교적 미덕을 옹호하는 것이다. 보테로의 아이러니는 종교가 군주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 말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종교는 신민을 군주에게 복종케 하고, 전쟁에 임해서는 용감하게 만들며, 위험에 처해서는 담대하게 해준다.” 기독교야말로 군주에게 가장 유용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필요한 경우에 신민의 몸과 재산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과 양심까지도 그 아래 두도록” 하며, “온건한 군주뿐 아니라 무도한 군주에게까지도” 복종하게 함으로써 “평화를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악한 교의’를 가르친 마키아벨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태도로 종교가 정치에 얼마나 유용한지 설득하는 것이다. 보테로의 이런 반마키아벨리적인 마키아벨리즘은 군주에게 ‘분별’을 택하라고 권하는 데서도 거듭 나타난다. 군주가 교활한 술책을 멀리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군주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군주의 결정에서는 이익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는 점을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이 군주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군주는 국가와 사실상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보테로가 말하는 ‘국가이성’은 ‘군주이성’이다. 보테로의 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마찬가지로 군주의 ‘통치 기술’을 조언하는 책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마키아벨리의 경우에 ‘로마사 논고’에서 ‘군주론’과는 사뭇 다른 논조로 공화주의 비전을 제시하지만, 보테로에게서는 공화국과 군주국 사이를 오가는 마키아벨리의 고뇌가 없다는 사실이다. 보테로의 책은 절대주의 왕정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더 나아가 이 책이 서술하는 국가의 보존과 확대에 관한 지침에서 기독교적 미덕을 앞세워 국가이익을 관철해온 근대 서구 세계의 대외 전략을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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