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위키미디어 코먼스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황장진 옮김 l 3만 9000원 브뤼노 라투르(1947~2022)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라는 저서로 유명해진 프랑스 철학자다. 인류학과 과학기술학을 통해 근대성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하는 독특한 방법론을 구사하는 학자다. ‘존재양식의 탐구’(2012)는 라투르가 학자 인생 말년에 내놓은 대작이다.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근대인의 실제 모습은 근대인이 스스로 그린 초상화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근대인은 전근대적 과거와 단절하는 부단한 혁명을 실현하고, 사실과 가치, 주체와 대상, 자연과 사회, 야만과 문명의 분리를 성취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좌절과 인간의 자연 정복이 낳은 생태 위기는 근대인의 기획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인이 자신과 타자를 파악하는 데도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고 라투르는 단언했다. 이때의 근대인은 서구인, 더 좁히면 라투르가 속해 있는 유럽인을 가리킨다. 말년의 이 대작에서 라투르는 앞선 저작의 논의를 이어받아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한번 발본적으로 파헤친다. 이때 라투르가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것이 이 책의 부제로 등장하는 ‘근대인의 인류학’이다. 서구의 근대가 낳은 인류학은 서구 바깥의 ‘비근대인’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라투르는 그 방향을 역전시켜 근대인 곧 유럽인을 인류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방법론을 통해 라투르는 근대인이 추구해온 과학, 기술,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도덕, 법 따위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그 실상을 밝히고 이 영역들의 존재 양식(modes of existence)을 검토한다. 핵심은 이 영역들의 존재 양식이 저마다 다르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하거나 흡수할 수 없다는 주장에 있다. 그러나 라투르가 보기에 근대인은 이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범주 오류’를 저지른다. 이를테면 오늘날 근대인들은 ‘과학’과 ‘경제’를 모든 것 위에 놓는다. 생태 위기나 환경 위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근대인은 공적 논쟁에 틈만 나면 ‘과학’을 들이민다. 생태 위기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비과학적인 괴담을 퍼뜨린다는 식으로 ‘과학’의 권위를 앞세워 논의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손익을 따지며 공적 논쟁을 막아버리기도 한다. 이런 사태를 두고 라투르는 근대인들이 공적인 논쟁을 끝장내려고 ‘과학’과 ‘경제’를 납치했다고 말한다. 공적 논쟁은 정치적 논쟁이다. 여기서 과학이나 경제가 지배권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라투르는 과학이 정치를 오해하듯이, 정치는 종교를 오해하고, 법은 허구를 오해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근대인은 각각의 존재 양식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알아보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라투르는 존재 양식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양성의 좌표계를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라투르가 제시하는 방법이 ‘외교’다. 각각의 존재 영역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망을 통해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 영역들 사이의 연결망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투르는 철학자로서 자신을 외교관이라고 말한다. 외교관이라면 어떤 영역을 대표해야 한다. 라투르는 무엇을 대표하는가? 라투르가 대표하는 것은 특정 영역이 아니라 영역과 영역 사이를 이어주는 그 연결망이다. 연결망을 중심에 놓고 존재 양식들을 보는 눈이 열리면, 이 양식들 사이의 평등한 대화와 교섭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짤 수 있으리라고 라투르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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