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위키미디어 코먼스
역사에 관한 글들
비-역사의 조건으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이찬선 옮김 l 오월의봄 l 2만4000원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는 20세기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역사에 관한 글들’은 알튀세르가 이론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1963년부터 1986년 사이에 쓴 미공개 글을 모은 책이다.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사유가 담긴 9편의 글이 묶였다. 알튀세르에 대한 상식적 이해를 뒤엎는, 반알튀세르적인 알튀세르를 만날 수 있는 드문 자료다.
알튀세르는 1960년대 구조주의 바람 속에 세운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알튀세르 단계’를 만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공산당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다.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서 아내 엘렌 리트만을 교살한 뒤로 사회에서 격리된 삶을 살다 생을 마친 광기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이 삶의 마지막 시기에 ‘우발성의 유물론’ 또는 ‘마주침의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비결정론적 유물론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까지 자신이 주장했던 구조주의, 다시 말해 생산양식이 최종심급으로서 사회의 모든 구조적 층위를 규정한다는 결정론적 이론을 거부한 것이 우발성의 유물론이다. 그러나 이 책에 묶인 글(‘그레츠키에게’)은 알튀세르가 이미 1970년대 초반에 우발성의 유물론을 깊이 사유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구조주의적 결정론자 알튀세르 옆에 그 결정론을 거부하는 탈구조주의자 알튀세르가 함께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구조주의 이론가로서 살다가 아내 살해라는 충격적 사건을 겪은 뒤 우발성을 긍정하는 사람으로 돌아섰다는, 알튀세르에 대한 기왕의 도식적 설명은 무너지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유고집에서 알튀세르가 ‘역사’에 대해 집요하게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975년에 쓴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 저작 ‘철학의 빈곤’에서 제시한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라는 명제에 주목한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의 나쁜 측면’을 ‘비-역사’라고 명명한다. 지배계급의 공식적인 역사가 ‘역사 아닌 것’으로 배제한 역사, 그리하여 공식 역사 밑에 깔려 사라진 역사가 ‘비-역사’다. 이 비-역사는 ‘착취당하고 압제에 신음하고 노역에 끌려간’ 대중의 역사다. 공식 역사가 지워버린 그 ‘비-역사’가 역사를 전진시킨다. 이런 인식으로 알튀세르는 억압받은 이들의 감추어진 역사를 통해 공식 역사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과제를 제출하는 셈인데, 여기서 역사를 구조의 틀 속에 집어넣어 이해하던 종래의 알튀세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알튀세르가 등장한다. 알튀세르의 표준적 초상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탈구조주의적인 사유의 움직임이 이 유고 모음에 출몰하는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