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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감옥 독방에서 싹터 우주로 날아오른 김지하 생명사상

등록 2023-11-17 05:00수정 2023-11-17 09:24

생명사상을 피워올린 시인 김지하.
생명사상을 피워올린 시인 김지하.

김지하가 생명이다
이재복 지음 l 도서출판b l 2만원

지난해 타계한 시인 김지하(1941~2022)의 후반기 반평생은 생명 사상의 탐구와 전파로 일관한 삶이었다. 문학평론가 이재복 한양대 국제문화대학장이 쓴 ‘김지하가 생명이다’는 김지하를 생명사상가로 주목해 그 작품과 사상을 천착하는 비평 작업을 모은 책이다. 평론가로 등단해 김지하의 사상을 알게 된 뒤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김지하 사상에 대해 사유하며 쓴 글이 제1부와 제2부에 나뉘어 묶였다. 제1부가 김지하 사상 자체를 가지런히 이해하는 데 바쳐졌다면, 제2부는 지은이 자신의 ‘몸사상’을 통해 김지하 사상을 해석하는 글들이 모였다. 제3부에 실린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2006년 당시 ‘생명과 평화의 길’ 이사장으로 있던 김지하와 일산 자택에서 만나 나눈 대담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했던 시절, 생명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이 대담에서 어떤 경로로 생명사상에 이르게 됐는지를 묻는 물음에 김지하는 두 가지로 답한다. 먼저 ‘사상적 측면’으로 동학과의 만남을 든다. 동학은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탄생했다. 중국에서는 서양 세력에 북경이 약탈당하고, 조선에서는 서해 앞바다에 서양 배가 출몰하고 흉년이 들고 콜레라가 창궐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두고 동학 창시자 최제우는 ‘악질만세’(악한 질병이 세상에 가득 차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 질병을 치료할 생명의 약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동학의 출발이었다고 김지하는 설명한다.

둘째로 거론하는 것이 ‘상황적 측면’이다. 김지하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서 싸우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7년 동안 투옥됐다. 이 투옥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안겼는데, 감옥에 있는 내내 좁은 독방에 감금돼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파괴하는 그 혹독한 상황에서 만난 것이 생명이었다. 창살 사이로 민들레 씨앗이 날아들던 봄날, 쇠창살과 시멘트 받침 사이에 풀씨가 내려앉아 싹을 틔웠는데 개가죽나무였다. “그런데 그게 그날따라 유난히 신선하게 보이는 거라. 눈물이 갑자기 확 쏟아지는 거라. 그러더니 허공에서 ‘생명, 생명’ 하고 환청이 들리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비좁은 독방에서 들은 그 환청과 함께 생명 사상이 시작됐다. 그 사상 체험이 출옥 뒤 동학 연구와 함께 깊어지고 역학·심리학·신학·철학을 비롯한 동서양의 여러 사상을 경유하면서 김지하의 독자적인 생명 사상으로 진화했음을 이 대담은 알려준다.

김지하의 생명 사상은 미학 영역에서 ‘그늘’ 또는 ‘흰그늘’이라는 은유로 나타났는데, 이 비평집은 이 미학 사상에 대한 집요한 탐문과 해석을 보여준다. ‘그늘’이라는 것은 판소리의 기본 개념인데, ‘인생의 쓴맛·단맛을 다 보고 수없이 피를 토하면서 소리를 갈고닦아 온갖 슬픔·기쁨·웃음·눈물을 융합해 표현해낼 수 있는 미학적 기량을 갖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은이는 김지하가 말하는 그늘이 “인간 내면에서부터 생성된 것”이며 “그 어두컴컴함은 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삶의 신산고초가 한을 짓게 하고, 그렇게 지어진 한을 삭이고 풀어내는 인욕정진의 과정이 있어야 그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지하 미학의 고유함은 그늘이 그늘에서 멈추지 않고 ‘흰그늘’로 승화한다는 데 있다. 이때의 ‘흰’은 ‘밝고 큰 하나’를 가리킨다. 그늘의 어둠이 밝게 빛나는 큰 하나에 이른 것이 흰그늘이다. 이 지극한 흰그늘의 경지는 인간과 우주의 생명을 포괄한다. 김지하의 생명 사상이 삼라만상의 어둠과 밝음을 모두 아우르는, 생명으로 약동하는 흰그늘의 사상임을 이 비평집은 알려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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