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전상국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6000원
소설가 전상국은 중·단편 9편을 묶어 “생애 마지막 소설집”으로 소개하고 있다. 194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그는 1963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60주년에 띄운 ‘마지막’의 예고엔 미련이 없어 보인다.
원로 소설가는 질곡의 근현대사와 오늘의 문학을 있게 한 거장들을 스스로 추념하며 새 시대에 부치는, 말하자면 전상국의 문학적 굿 한마당을 마지막 작정한 듯 보여준다 하겠다. 지난 7년치를 모았다. 특히 한국전쟁의 그늘을 관통하여 이제 무관심할 법도 한 지금의 독자들 앞에 재조명시키려는 데서 정좌한 외곬의 노 작가가 그려진다. 주제에 있어 1963년 등단작 ‘동행’과도 만나 60년을 수미쌍관 해내는데, 전상국은 “모두를 내려놓아야 할 나이에 잔불 살리듯 공을 들”여 새 소설집을 완성(‘작가의 말’)했다 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편 ‘굿’이 돋을새김 된다. 화자는 땅속 생매장되는 악몽을 꾸는 나정기. 강원도 궁벽한 시골마을(부귀리)이긴 해도 오래된 토박이 유지 집안에서 나고 자라 교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새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에 짓눌려 수면장애를 겪는다. 가뭇한 기억을 복기하려 할 때 소싯적 그것을 함께 겪어 기억 나눌 만한 이는 일절 모르쇠 고개를 젓는다. 망상인가, 치매로 가는 길인가.
12년 만에 새 소설집을 펴낸 소설가 전상국(83). 스스로 “생애 마지막 소설집”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나정기는 되뇐다. “잊지 않아 득이 있다면 잊었기에 얻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 얻고 버림의 기능의 마비가 곧 치매라는… 시간 개념의 무너짐이다.”
이 말이 나정기에게서 멈추지 않고, 21세기 여기를 결국 향하고 있음이 작가가 거슬러 형상화한 악몽의 연원으로 알만해진다. 시대비극에 대한 ‘집단적 치매’, 하여 또 비극을 되풀이하고 마는 현 세태 또한 곧 누군가 꾸게 될 악몽일 것처럼 말이다.
1950년 중반 10살 무렵 나정기의 흐릿한 기억을 닦아세우는 건 때마침 최근 마을에 나타나 과거를 휘젓는 최용호라는 자다. 하지만 그는 당시 난리통에 죽질 않았던가. 최용호라 이른 자는 최용호의 소상한 기억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무덤’, 나아가 ‘망각’이란 이름의 비석을 파헤치고 뽑아 부귀리의 비밀을 하나둘 들춘다.
최용호는 나정기보다 다섯 살 어렸던 아이 최준성의 아버지다. 부귀리에 이주 정착해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 완장을 찼던. 하지만 석달도 못 되어 반도의 전세는 바뀌고, 마을 사람들은 최용호를 때려죽인다. 그때 일조한 이가 나정기의 아버지다.
최용호의 죽음 이전엔 휴가 나왔다 읍내 자위대원들에게 죽임을 당한 국군 일병 정대수가 있고, 정대수를 최용호에게 일러바친 나정기와 죽마고우 종구가 있고, 부귀리로 숨어들었다 발각되어 산 채 파묻힌 인민군 소년병이 있으며, 아들을 인민군에 빼앗기고 자신도 빨갱이로 오해받은 장영팔이 있다.
얽히고설킨 반목과 살육의 기억을 70년이 다 된 마당에 가장 공포스러운 이름으로 되살린 이는 다름 아닌 최용호의 아들 준성이었다. 아버지의 영혼과 접신하며 때로 미친 광대로, 신명 나는 소리꾼으로, 한 많은 상주로 부귀리의 둔짓골, 가막골에 묻힌 진실을 불뚝 대면시킨다. 이때 목적은 에염 가득한 가족의 복수가 아니요, 정반대의 이유로 죽임을 당한 정대수와 최용호의 유해 발굴, 합사를 통한 공동체적 해원에 있다.
최용호 척살을 거둔 장영팔이 시신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올려둔 돌 덕분에 최용호의 오래된 유골 자리도 찾거나, 그러면서 함께 통곡하는 장영팔과 최준성, 그리고 그들보다 더 서럽게 운 장영팔의 ‘베트남’ 며느리 등의 설정은 이 지점서 상징적이다.
“…다 피해자라 그겁니다. (…) 솔직히 이놈의 세상 언제 뒤집히나 그런 생각 많이 하고 살았지요. 허나 그거 아닙디다. 세상 또 뒤집히면 지금까지 억울하게 살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되면 다 죽어요. 죽으면 민족이고 나라고, 그거 다 소용없다 그 얘깁니다.”
이 날것의 진혼과 회한이 진영 간 골이 더 깊어진 이 시대에 공명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어디에도 없고 어딘가에 있는’ ‘저녁노을’ ‘조롱골 우리 집 여인들’도 작가 말대로 “한국전쟁의 악령, 오늘날까지도 불신과 증오의 천형을 사는 사람들의 절규, 그 울분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들”이다.
전상국의 소설들이 고밀도의 역사의식으로 당대를 압박하지만은 않는다. ‘춘천 아리랑’ ‘봄봄하다’ ‘가을하다’는 김유정과 황순원에 대한 곡진한 오마주로, ‘동백꽃’, ‘봄·봄’, ‘소나기’의 후편을 각기 지어낸 것이다.
가령 ‘동백꽃’의 점순은 ‘춘천 아리랑’에서 더 솔직하고 야무져 있다. “상판때기만 쳐다봐두 되우 좋다”거나 춘배 볼에 먼저 입 맞춰버린다. 둘은 금병산 장수바위에서 만난다. 노란 동백꽃, 개나리 흐드러진 봄날, 점순은 “서울 부잣집에 시집가”게 됐다고 으름장 놓고 “도망가자” 하지만 가난하고 숫기 없는 춘배는 눈만 멀뚱거린다.
“그러믄 울 아부지 울 어머이 징역 간다. 너 데리구 도망갔다구.”
어이를 잃은 점순의 독백이 들어줄 만하다. “효자 났다. 더 웃긴 건 내가 절 데리고 가지, 지가 날 데리고 도망간다니 그게 말이 되냐.”
시간은 흘러 6년 뒤인 1940년 양주에서 6년째 시집살이 중인 점순. 동백꽃은 그녀가 시댁에서 사랑받는 방편이다. 동백잎을 찹쌀풀에 묻힌 튀각을 죄다 좋아했다. 강원 동백은 남해에서 올라오는 동백과 달리 알싸한 냄새만으로 품속이 야릇해지던 꽃. 동백조차 ‘생활’이 될 즈음 고향 춘천을 가게 된다. 때마침 친구가 전해준 소식에 가슴 설레는 점순. 6년 전 한동안 실성했던 춘배가 가족과 모두 만주로 떠난 뒤, 금병산 장수바위에 새겨진 춘배의 글씨를 발견했다는 거다.
“점순아, 너두 거기서 춘배하구 그랬니?”
식별할 수 있는 글귀는 “점순아……” 세자뿐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실은 시집간다, 도망가자 했던 점순이 보는 앞에서 춘배가 울며 돌을 내리쳐 새긴 글귀이므로 나머지는 아무렴 ‘도망가자’ ‘같이 살자’ 다짐이고 맹세이지 않았을까.
토라지고 애태우는 순수 에로스의 향연은 ‘봄봄하다’에서도 여실하다. ‘소나기’ 후속 ‘가을하다’에서 주인공 현수는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 성장통을 겪는다.
이번 소설집이 품은 두 갈래 이야기의 온도차는 실로 큰데 모두 고색의 문체와 감각으로 되레 신선하고 선선해진다. 작가는 15일 <한겨레>에 “마지막 소설이란 생각으로 소명처럼, 할 얘기를 다 하고자 했다”며 “그런데 아직 더 써야 할 게 남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며 웃었다. 그가 젊은 독자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