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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작가 얀 마텔 “책 읽지 않는 위정자의 꿈은 악몽”

등록 2023-06-13 14:53수정 2023-06-13 20:54

1200만부 팔린 맨부커상 수상작 집필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화도…첫 방한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60). 작가 데뷔 30돌을 맞아 첫 방한, 13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상, <파이 이야기>의 창작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60). 작가 데뷔 30돌을 맞아 첫 방한, 13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상, <파이 이야기>의 창작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누구에게 책을 읽어라 마라 하고 싶지 않다. 판단하고 싶지 않다. 다만 권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다르다. 총리나 수사기관장, 기업 총수 같은 이들에겐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당신의 비전, 꿈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어야 한다. 서구에선 중년 백인 남성들이 픽션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든 걸 지배 중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들이 꾸는 꿈이 내겐 최악의 악몽이 될 수 있다. 픽션은 가치 있는 꿈, 살아갈 수 있는 꿈을 꾸기 위해서 필요하다.”

전 세계 50개국에 소개되며 맨부커상 역대 수상작 가운데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 중인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60)이 작가 데뷔 30돌 등을 맞아 처음으로 방한했다. 영국 맨부커상은 세계 3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영 연방 국적 등의 작가가 대상이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은 대학에서 철학 전공 뒤 1993년 데뷔했고 1996년 첫 장편 <셀프>의 흥행 실패 뒤 창작을 위해 머물렀던 인도에서 15분가량 우연히 만난 노신사를 통해 <파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구할 수 있었다. 얀 마텔은 소설의 ‘작가 노트’에 “어릿광대나 곡예사 노릇까지 불사하며 언론 홍보에 주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책은 꿈쩍하지 않았다”며 <셀프>가 “곧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고, <파이 이야기>로 나아가기까지를 회상한 바 있다.

인도 마드라스 남쪽 폰디체리에서 ‘사라진 동물원’이 있다는 게 백발 노신사 아디루바사미의 귀띔이었고, 실제 그 주인공 파텔과의 인터뷰, 조사 등을 거쳐 1년반여 동안 <파이 이야기>를 완성했다. 소설 속 파텔은 폰디체리에서 동물원을 소유한 힌두교 집안 아들로, 캐나다로 이민 가던 중 태평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부모와 가산을 모두 잃고, 구명보트 위 호랑이와 단둘이 남게 된다. 7개월 동안 망망대해에서 사투하는 열여섯살 소년의 모험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란 철학적 사유를 뭍에 닿기까지의 여정에 유려하고 경쾌한 필치로 기워냈다.

얀 마텔의 유일한 소설집인 &lt;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gt;(1993)과 베스트셀러 &lt;파이 이야기&gt;를 합본한 특별판 표지.
얀 마텔의 유일한 소설집인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1993)과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를 합본한 특별판 표지.

얀 마텔은 13일 서울 정동 주한 캐나다대사관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전까지 등한시했던 종교, 동물이 많이 와 닿았고, 인간이 신적 존재들과 동물 사이의 접점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며 “<파이 이야기>는 세속적 관점에서의 신적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고 소개했다.

소설은 2002년 맨부커상을 받았고, 독서인을 자처하는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신의 존재에 대한 우아한 증거”라고 평한 바 있다. 2012년 이안 감독이 만든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역시 각종 상을 휩쓸며 흥행에 성공했고, 책은 현재 전세계 누적 판매고가 1200만부에 이른다고 소개된다.

1주일 전 국내에 들어온 얀 마텔은 이날 간담회에서 아들과 함께 다녀온 비무장지대(DMZ)를 두고 “비극과 자본주의가 합쳐진 전쟁관광(상품) 같아 충격을 받았다”며 “극명히 국가가 맞댄 곳은 처음 가봤다. 디엠지가 국가의 한 상처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상의 방한 첫 소감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와 한국은 올해 수교 60돌을 맞는다.

얀 마텔은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일인 14일 오후 5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그는 “도서전 쪽에도 강연 내용을 주지 않았는데, 창의력과 인생 자체가 ‘코크리에이션’(Cocreation, 공동 창조)이란 점을 청중과 나누게 될 것 같다”며 “아마도 강연 10분 전쯤 내용이 확정될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파이 이야기>가 완성된 경위가 사실상 공동창조 과정이었다는 의미도 전해질 법하다. 17일 오전 11시엔 팬 사인회가 열린다. 여러 작품이나 후기에서 감추지 못하는 작가로서의 재치와 달리 얀 마텔은 간담회 내내 진지하고 사색적인 면모를 보였다.

<파이 이야기>를 2004년 국내에 소개한 출판사 작가정신은 얀 마텔의 첫 방한을 계기로 그의 유일한 소설집인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1993)과 <파이 이야기>를 묶은 특별 합본판을 출간했다.

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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