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의 첫 장편소설
군부독재에 무너진 삶 복원
‘퀴어적 통속’과 입담으로
지난 시대 새 감각 자아내
군부독재에 무너진 삶 복원
‘퀴어적 통속’과 입담으로
지난 시대 새 감각 자아내
김멜라 지음 l 창비 l 1만6800원 “지난겨울에 아시안게임 말이오. 축구 봤소? 차범근이 나왔던 거?” “아주머니가 붉은색 옷을 입고 봤다는데, 참말이오?” “이에?” “붉은색이면 북한팀 아니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하이쎈스가 김영삼이를 지지한다지?” “이에? 누구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 그 말이 좋다고 했다지?” “아니, 그거는, 그냥 말이 웃겨설랑……” “나랏일이 웃기는 일이겠소.” “바깥양반이 막걸리 자시며 윗분 얘길 했다는데.” (묻는 자가 흉내 내길 “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탁주냐. 박통은 여기에 맥주를 타 마신다던데.”) “예, 재미로다가 (…) 우리는 막걸리가 시원해서……” 내몰아치는 정보과 형사의 고작 몇 마디 추궁에 서울 남산 아래 하숙집을 운영하던 젊은 여인 사귀자는 바로 흙바닥을 기며 숨넘어갈 듯 살려달라 빈다. 이웃 단 한 명에게만 말한 일까지 형사는 꿰고서 사귀자를 옭아맸으니까. “저 산 밑에서 생사람을 잡아대는 인간 백정”만큼이나 사귀자는 밀고자를 저주했다. “뒈질 것들, 혀를 뽑아 불에 던질 것들.” 사귀자는 누구인가. 전남 여수 출신으로 서울서 차별받다 남편과 겨우 터 잡아 차린 것이 큰별하숙집(하필 이름도. “…큰별이 누구요. 저 북에 수령 아니오?”) 일머리가 좋아 금세 성업하고 음식솜씨, 눈치도 좋아 별명이 ‘하이쎈스’다. 글도 깨우치질 못했으나 글씨체가 또한 명문. 하지만 무슨 팔자인지 행복할라치면 어느새 다른 불행이 엄습해 있고 결국 이번엔 꺾이지 싶으면 애면글면 기운을 차리는 여성. 그런 그가 자살까지 시도하게 한 저 시대는 남산에 안기부가 있고, 병해목인 양 간첩으로 몰아 의식 있는 양민조차 솎던 1970~80년대. 사귀자가 딸 샛별을 낳아 하숙집을 키우던 중 난데없이 간첩사건에 연루된다. 하숙생 중 가장 예뻐라 한 명문대생 순영이 간첩죄로 붙잡히기 전, 순영을 도와 하숙생들을 소시지 부침 요리로 포섭하고 물가 정보 따위를 수집했다는 예비 신문 보도안을 들이미는 형사한테 “가계부 쓰는 것도 간첩인가요?” 물으면서도 “그년이 간첩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순영의 요구대로 “김일성 만세”도 써줬다고 증언한 것. 줄거리 더듬길 이쯤서 이 장편소설의 작가를 가늠해보면 짐작이나 될까. 아무렴 어렵겠다. 2014년 등단한 이래 ‘퀴어 서사’ ‘퀴어 정동’의 맨 앞에 선 작가로 불려온 이니까. 이런 수사의 진실은 소재 자체보다 ‘일반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전복적 에너지로 더 유효해진다. 이 에너지의 발산은 유쾌하고 결결이 노골적이므로, 가족중심주의, 이성애 따위는 달궈진 프라이팬에서 볶이거나 마침내 튕겨 나가는 콩조각들. 소설가 김멜라(40)는 첫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를 두고 1일 <한겨레>에 “지워진,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이야기”로 “그간 많이 다룬 소수자·퀴어라는 하나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군부독재 시대를 작품 배경 삼은 적은 단 한 번 없었다. 사귀자가 이후 처절하게 “없는 듯” 살게 된 이유는 순영이 엮인 시국사건이 조작된 것이란 사실을 남편과 알게 되면서다. 순영이 투신자살하자 남편도 실성해 죽는다. “속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을 다 속인 사람은 자신인 것 같았다”는 사귀자도 목을 매달았으나 그를 밀고했던 이웃집 여인이 의도치 않게 살렸다. 첫 장편의 힘을 추려본다. 일반적인 것을 전복해온 김멜라의 통속 시대물(?)이라는 의외성. 충분히 재현되지 않았느냐 물을지도 모를 시대의 길고 긴 유산을 결코 그렇지 않다는 양 웃프게 드러내기. 의외의 접점에서 의외의 재현을 위한 장치가 알짬일 텐데, 첫번째로 그간 단편에선 덜 드러났던 김멜라의 작정한 입담이다. 특히 사귀자의 생애를 좇을 땐 마치 판소리 ‘사귀자전’처럼 김멜라에게서 이문구, 한창훈, 천명관 등의 구성진 입심이 살아나온다. 몇몇 구어체는 이문구 등에게서 도움받았다고 작가는 부언했는데, 말고도 적재적소 말맛과 감각을 살리는 순우리말이나 관형어구는 작가의 별난 노고를 엿보게 한다. 감춰진 이들을 불러내는 화술 같고, 이때 ‘제의’가 단순 한풀이나 청승 타령일 수 없다. 두번째 장치로, ‘일반적’인 것(가족·이웃의 공동체적 운명 등)과 ‘이반(퀴어)적’인 것들(조모-손녀의 기괴한 동거 등) 사이, 말미엔 현실과 환상까지 옮겨 다닌 결과 누군가에겐 통속적일 수 있는 시대 비극의 전혀 다른 감각을 자아낸다. 이반, 환상과의 교직은 사귀자의 손녀 아세로라로 옹근 가능해진다. 머리를 밀고 튼튼한 종아리에 털까지 난 10대 여자. 각선미, 육체미 따위는 제 인생에 없는 말. 단 하나 지닌 미(美)라면, ‘비장미’.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가혹할 만큼 길다고 느”끼는 여자아이는 “모르는 것과 불확실한 것 사이에 얼굴이 짓눌리는 것 같”은 내면의 고통과 바깥을 향한 분노를 품고 산다. 그는 가장 아끼는 남동생 강호(별명 칭퉁이)를 희귀 면역질환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햇볕을 쬐면 피부가 짓무르고, 초콜릿, 라면, 고기는 물론 쑥과 콩만 먹어도 강호는 아픈 아이. 그림을 잘 그리는 강호는 누나 그리길 좋아했다. 아세로라는 오직 동생 앞에서 자신이 덜 미웠다.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누나는 혼자 먹지만 말라고” “치사한 게 더 나쁘다”며 “자기도 볼 수 있게 먹어달라고” “어떤 맛인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달라고, 그럼 같이 먹는 게 되는 거라고”까지 했던 칭퉁이 몰래 돼지갈비를 먹고 탈취제를 뿌리기도 했던 부모조차 일하던 학교의 횡령사건에 난데없이 연루되어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할머니 사귀자가 살던 서울 남산빌리지 상가건물의 미등기 상가에 아세로라가 숨어 살게 된 배경이다.
2014년 등단 이후 처음 장편소설을 낸 김멜라 작가. 사진 ⓒ온점,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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