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권력자들
인물로 읽는 20세기 유럽정치사
이언 커쇼 지음, 박종일 옮김 l 한길사 l 4만원
대작 <히틀러>로 널리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80)는 유럽 현대 정치사 연구의 대가다. 커쇼의 최근작 <역사를 바꾼 권력자들>은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인물로 읽는 20세기 유럽 정치사’라 할 만하다. 20세기를 연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부터 20세기를 사실상 끝낸 ‘베를린 장벽 붕괴’ 시점에 독일 총리를 지낸 헬무트 콜까지 12명의 유럽 정치가가 등장한다. 두 사람 사이를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처칠, 드골, 아데나워, 프랑코, 티토, 대처, 고르바초프가 채운다.
커쇼는 시대의 환경과 조건에 주목해 정치적 변화를 설명하는 ‘구조역사학’의 관점에 선 역사학자다. 그런데 인물을 중심으로 삼아 시대를 읽어내면 어쩔 수 없이 ‘인물이 시대를 어떻게 바꿨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의 진행을 서술하게 되기 쉽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커쇼는 개별 정치가의 생각과 행적을 그려내기에 앞서 장문의 ‘서론’에서 ‘개인과 역사’의 관계를 먼저 탐문한다. “유럽의 20세기가 결정되는 데 정치 지도자의 행위는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끼쳤을까? 정치 지도자들이 유럽의 20세기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유럽의 20세기가 그들을 만들었을까?”
이런 물음을 던진 뒤 커쇼는 역사 해석의 모범적인 사례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거론한다. 이 짧은 논문은 1848년 혁명으로 집권한 뒤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이어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는 루이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이 글의 첫 줄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 직접 맞닥뜨리고 주어지고 물려받은 조건 속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런 전제 위에서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보잘것없는, 어릿광대 같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사회정치적 세력 사이의 균형’이라는 조건을 잘 이용한 데 있다고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중 어느 쪽도 대세를 잡지 못한 ‘힘의 공백’ 상태에서 루이 나폴레옹이 위기와 혼란을 이용해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
커쇼는 시대적 맥락과 조건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정치적 인물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된다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조건 속에서 탄생한 정치 지도자가 그 자신의 개성과 행위로 자기 시대에 막대한 충격을 주고 후대 역사에 거대한 유산을 남긴다는 사실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충격과 유산의 크기가 클수록 정치 지도자의 중요도는 높아진다. 요컨대 이 책은 역사의 조건과 맥락을 중시하는 것과 함께 정치 지도자의 개성이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역사적 조건은 특정 인물을 지도자로 탄생시키지만, 그렇게 탄생한 지도자는 역사의 행로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정치 지도자의 경우를 보면, 이 인물들의 특이한 ‘개성’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폭압성이 극단화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됐다.
이런 관점으로 12명의 정치 지도자들을 살핀 뒤 결론에 이르러 커쇼는 ‘충격과 유산’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볼 때 20세기 유럽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레닌과 스탈린과 히틀러를 꼽는다. 레닌은 20세기를 관통한 이념적 균열을 현실로 만들어낸 사람이고, 스탈린은 소련 체제를 구축해 제2차 세계대전 승리와 유럽 절반의 위성국화를 이끈 사람이며, 히틀러는 역사에 유례가 없는 참혹한 전쟁과 물질적·인도적 파괴를 가져온 사람이다.
한 사람 더 주목한다면 고르바초프다. ‘철의 장막’을 걷어낸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종식하고 유럽 대륙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단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틀러와 고르바초프의 개성만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히틀러와 고르바초프는 각각 20세기 전반기와 20세기 후반기에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었다. 커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에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두 인물이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