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미국 워싱턴에서 펼쳐진 ‘시민권 행진’에 참여한 해리 벨라폰테(가운데)와 그의 친구 시드니 포이티어(왼쪽), 찰턴 헤스턴(오른쪽)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의 가수·배우 해리 벨라폰테(1927~2023)가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를 최근 접했습니다. 올드팝 팬이라면 카리브해 음악을 대중화한 앨범 <칼립소>(1956)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벨라폰테는 대체로 국내에 아주 친숙한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자메이카계 미국인인 벨라폰테는 찰리 파커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렸고, 유명 연예인이던 60년대에 동료 시드니 포이티어와 함께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회운동가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힙합 음악과 미국 흑인운동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나름북스)은 벨라폰테에게도 한 장을 할애했는데, 특히 그가 선배 가수·배우 폴 로브슨(1898~1976)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로브슨은 학자인 듀보이스와 함께 국제적인 식민주의 반대 기구를 설립하고 <프리덤>이라는 잡지를 발행해 반인종주의·반식민주의 주장을 거침없이 이어갔던 인물입니다. “내 모든 생애가 그를 향한 오마주”라고 말했을 정도로 벨라폰테는 그의 뒤를 충실히 이었고, 국내 인권운동뿐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비판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진보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합니다.
‘칼립소의 왕’인 벨라폰테는 뜻밖에도 힙합의 “문화적 가치”를 가장 빠르게 알아본 인물이기도 합니다. 1984년 힙합 문화를 다룬 영화 <할렘가의 아이들>의 제작에 참여했다죠. ‘세상의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떠들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아마도 그가 힙합에서 발견한 가치였겠죠. “예술가는 진실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라는 로브슨의 말은, 벨라폰테를 거쳐 또 어느 누구에게로 이어지게 될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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