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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팔순의 시인 신달자 “시는 또 올 텐데 시집이 또 올까요”

등록 2023-04-14 05:00수정 2023-04-14 09:17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신달자 지음 l 민음사 l 1만2000원

팔순을 넘겨 시집을 출간한 여성 시인을 세는 데 한 손이 다 들지 않는다. 지난 7일 출간된 신달자 시인의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은 자신의 나이 여든, 등단 59년을 새긴다. 그보다 더 차별적인 것은 비슷한 시 생애주기에서 지배적으로 보이는 초탈과 무념, 영성과 탐미의 말로적 관념에 시인은 그닥 닿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그 몸짓은 다분히 ‘헐은 몸’의 행색이고 행태인데, 시인이 먼저 당도한 세계에서 전하려는 건 바로 그 몸짓의 ‘생동성’이다.

몸도 마음도 쑤시고 결리고 아프지만 초연하리라 당연시하는 세태에 대한 시적 저항.

“잠들기 전/ 브래지어를 풀다가 흠칫 놀란다/ 브래지어에도 이빨이 있는가/ 서리 묻은 브래지어에서 어석어석/ 얼음 깨무는 소리 들린다// 낮에 그가 동짓달 고드름 같은 말로/ 내 가슴을 지나가더니/…// 오뉴월 서리가 내 가슴에 꽝꽝 다졌다/ 무겁게 그 하루를 보내고/ 잠들기 전/ 브래지어를 푸는데/ 말의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내 가슴이 히말라야 산등성이처럼 얼음 절벽이네//….”(‘브래지어를 푸는 밤’ 부분)

이 생경한 고통에의 진술은 ‘늙음’에 물들어 온전히 자복할 때 가능한 듯 보인다.

“웃은 것을 기억 못해서 다시 웃는다”(‘기억이 날 못 본 체하면’)는, “살집만 서럽게 홀로 진흙으로 늙어 가는 여자 같은”(‘뻘1’) 처지에 머물지 않고 허름히 찾아오는 가령 “수심이랄까 근심이랄까 상심이랄까/ 아픔과 시련과 고통과 신음과 통증들은/ 모두 나의 양 떼들이라// 나는 이 양들을 몰고 먹이를 주는 목동”이 되고자 한다, “오늘을 사랑하기 위하여 양 떼들을 달래기 위하여”(‘나의 양 떼들’ 부분) 고통이 가장 명징한 삶의 증거다.

이 시집에 “죽음”이 없는 건 아니다. 넋두리가 없지도 않다. “멍텅구리”라는 잦은 시어로 자책하듯 눙칠 수밖에 없는 건 어느 젊은 시절엔 아니 그랬나 싶기 때문일 거다. 여든의 몸이 겪어내는 신산의 기록과 생의 감각을 여든 시인이 고유하게 증언하는 방식.

올해 여든에 이른 신달자 시인. 민음사 제공
올해 여든에 이른 신달자 시인. 민음사 제공

시인은 1943년 출생으로 1964년 <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재등단해 이참 17번째 시집을 냈다. 2021년 여든에 먼저 시집(<터무니>)을 낸 유안진 시인도 목월의 추천을 받았다. 앞서 김남조 시인이 2013년 86살 펴낸 시집(<심장이 아프다>)이 있다.

신달자 시인은 13일 <한겨레>에 “지속적으로 한 사람, 한 시인의 인생을 기록해 간다는 게 중요하다. 이전엔 정신이 최고인 줄 알았지만 이제 내게 몸이 있었단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 ‘계속 시를 쓰시느냐’ ‘시집을 또 기대해도 되겠는가’ 묻는 기자에게 “시가 또 오지 않겠는가” (웃으며, 하지만) “시집이 올지는 모르겠다, 보통 3, 4년이 걸리던데 제 시간은 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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