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던 2019년 10월 산티아고 시내 벽화로 부활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책과 국기를 들고 낙태권의 상징인 녹색 수건을 둘렀다. 예술가 파브 시라올라가 그렸다. 아티초크 제공
밤은 엄마처럼 노래한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지음, 이루카 옮김 l 아티초크 l 1만5500원
“칠레의 다른 노벨상 시인 (네루다는 잊으시고요)”
“네루다는 비키세요, 칠레 청년들 새로 좋아하는 시인이 생기다.”
종이신문과 디지털에서 각기 위 제목으로 발행된 외신 기사는 최근 칠레에서 떠오른 인기 시인(“A new favorite poet”)을 조명하고 있다. 칠레의 대명사라 할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는 그들 말로 “저리 가라(move over)”다. 지난 2월2일치 <뉴욕 타임스> 책 섹션의 주요 기사. 새 시대 아이콘으로 떠오른 시인은 뜻밖으로 사망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여성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889~1957)이다.
기사는 미투와 2019년 10월 칠레 사상 최대규모의 시위를 거치며 그간 출판시장에서 미스트랄이 “무시된” 사정과 여성·빈자·원주민 권리 등을 대변해온 작가로서 재각광받아 그의 작품집, 전기 등이 (재)출간되는 근황을 짚었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의 열렬한 지지. 네루다는 저물고 있다. 아내와 장애아였던 딸을 버렸다는 주장, 스리랑카 외교관 시절 현지인 하녀를 성폭행했다는 네루다의 회고록 등이 쟁점이다.
미스트랄이 1920년 테무코 고교에서 만난 제자가 당시 네루다(당시 16살)다. 책을 권해주고 시를 평가해주던 스승으로 평생 사제의 우애를 이어갔다.
기실 미스트랄은 네루다의 대체도, 페미니즘의 전유물일 수도 없다. 미스트랄의 본질은 가령 이런 데 있다. 21세기 들어 그를 먼저 부른 건 재앙이었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산호세 구리광산 갱도가 무너져 700m 아래 지하에 갇힌 광부 33명이 69일 만에 구조되던 2010년 8월5일. 광부 마리오 세풀베다가 언론에 말했다. “저는 신과 함께 있었고 악마와도 있었다. 둘 다 날 놓고 싸웠다. 신이 이겼다.” 두달여 버티며 그들이 노래 부르고 기도하고 또한 읽었다는 시는 네루다, 니카노르 파라, 그리고 미스트랄의 것이었다.
‘절망적 희망’이야말로 그중 미스트랄적(的)인데 이제야 국내서 확인하게 되는 시적 증언은 이러하다.
“…//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구나,/ 네게 오렌지를 썰어 주지 않는 것이,/ 내가 마저 먹을, 네가 먹다 남긴 빵이 없는 것이,/ 네가 들어올 때 잠긴 문을 열어주곤 했는데/ 이젠 그러지 못하는 것이.// 죽음과 그의 종들이 할일을 모두 마쳤는데도/ 엄마 눈에는 여전히 네가 보이니 놀랍구나./ 꺾이지 않은 갈대나 골풀처럼 꼿꼿이 서 있다가도/ 엄마가 부르면, 아니/ 부르지 않아도 너는 달려오지.//…// 잠든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우리는 가고 또 가고 있는 거야,/ 우리가 만날 곳을 향하여./ 그런데 우리는 모르고 있어,/ 우리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음을.//…”(‘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부분)
죽은 아들은 세상 너머 있으나 시상 안에 함께 있다. 미스트랄에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다시 만나야 할 이유이다. 다만 그 여정에서 절망이란 외투를 아프게 걸쳐야 한다, 자책하고 울어야 한다.
“노래는 부르지 마―/ 혀에 노래를 달고 사는 너/ 그렇게 꼭 불러야만 하는지// 키스도 하지마―/ 기묘한 저주처럼/ 그 키스는 내 몸속을 파고들지 않아// 기도해, 기도는 달콤하잖아―/ 하지만 너의 구원자 하나님을/ 네 탐욕스러운 혀에 올리는 건 곤란해// 죽음을 자비롭다 하지 마―/ 한 조각 살아남은/ 네 희고 흰 살점이, 그 무한한 살점이/ 흙에 질식되고, 질식되고/ 네 머리칼을, 그 무수한 머리칼을/ 게걸스러운 구더기들이 분해할 테니”(‘노래는 부르지 마’ 전문)
안데스 산맥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미스트랄은 독학으로 교사가 됐다. 사회주의자라며 사범고등학교 진학이 막힌 탓이다. 교사이자 방랑시인인 아버지의 가출(3살), 첫사랑의 자살(20살), 사실상의 망명(37살), 우익정부의 연금중단(40살), 무솔리니 정부와의 마찰(43살), 양아들의 자살(54살) 따위로 점철된 삶은 시와 교육, 여성·아동권 신장에 헌납됐다.
칠레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889~1957).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아티초크 제공
1945년 스웨덴 국왕(구스타프 5세)으로부터 노벨문학상을 받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노벨상위원회는 “격정 가득한 그녀의 서정시가 그녀를 남미 세계 이상주의적 열망의 상징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스트랄은 “시인의 사명은 이상을 창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으로 확장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티초크 제공
1945년 라틴문학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네루다(1971년 수상)나 파라와 달리 미스트랄의 시집이 국내에 소개된 적 없다. 시인으로 처음 주목받은 25살의 시 ‘죽음의 소네트’부터 동시까지 34편을 엄선한 <밤은 엄마처럼 노래한다>가 지닌 의미다.
그의 첫 시집으로 노벨상위원회에서 “가장 뛰어난 시집”으로 평가한, 즉 노벨문학상 수상작 격인 <황폐>(1922)는 꼬박 1세기가 지났다. 100년 전 시까지 ‘현재성’을 띠고 있다면, 모름지기 더 불가해해진 도처의 죽음과 슬픔, (모성애적) 사랑, 여성 주체성, 믿음, 부활 등을 먼저 삶과 시로 관통한 덕분이리라.
특히 라틴 여성의 ‘대모’로서의 목소리는 선연하다. “나는 사람들이 내 딸을/ 새로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멀리 날아가 버릴지 모르니까/…// 나는 사람들이 내 딸을/ 공주로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금으로 된 작은 신발을 신고서는/ 들에서 뛰어놀 수 없을 테니/…// 나는 사람들이 내 딸을/ 여왕으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밤이 와도/ 내가 잠재울 수 없을 테니까/…”(‘두려움’)라고 미스트랄은 염원하므로, 그의 여자들은 “…더이상 원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계급과 육체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피의 노래와 사춘기의 발라드를 매장했다”(‘무희’). 패배하면서도 거듭 꿈꾼다.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여왕이 될 거야/ 진심으로 왕국을 다스릴 거야/ 왕국은 드넓고/ 우리는 모두 바다에 도달할 거야.””(‘우리는 모두 여왕이 될 거야’ 부분)
여성 인권이 소녀소년의 인권과 동반성장해온 인류사로 볼 때, ‘남미 아동문학의 선구자’ 미스트랄도 당연해 보인다. 그가 지은 동시로 만든 명작 그림책은 2014년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았다. 차라리 국내 어린이들이 먼저 미스트랄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배경. 1957년 췌장암으로 죽기 전년 미스트랄은 남미에서 출간된 모든 저작의 인세를 자신이 자란 지역의 아이들에게 써달라고도 유언했다. 왜일까.
“손가락을 도둑맞은 소녀가 있는 곳이라면/ 그 도시는 아름답지 않아요.”(‘손가락을 잃은 소녀’ 부분)
“꿈속의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슬픔도 기쁨도/ 새벽까지 지켜야 할/ 보물도/ 나이도 이름도/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내가 원래 있던 곳에는 고통이 없었다.”(‘자유’ 부분)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이 ‘위대한 교육자’로 왜곡 활용해 되레 후대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이제야 맨얼굴로 21세기 칠레인들을 만나고 국내에도 도착했다. 번역자 이루카씨는 “라틴아메리카 시라고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네루다가 언급되는 현실에 토를 달 수 없는 노릇이긴 하나, 최근까지도 미스트랄의 문학적 위상이 네루다에 필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다른 많은 업적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라고 적었다.
시집이 얇아 아쉬울 뿐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