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비평
노태훈 지음 l 민음사 l 2만2000원
문예지에 실린 비평을 읽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짧은 지면을 차지한 알려지지 않은 평론가의 글을. 그 글은 문예지의 구색을 갖추는 데는 꽤 도움이 될 테지만 대화의 씨앗조차 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은 미미하다. ‘비평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비평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비평은 누구나 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적어 내는, 즉 모든 종류의 독후감은 당연하게 비평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래도 비평이라는 행위는 상당히 훈련된 전문가가 정제되고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해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겸하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글’, 그런 글들이 문예지에 실린다.
이를 동반시키는 건 이른바 ‘문단 권력’의 생태다. 출판사가 발행하는 문예지를 통해 작가의 새 단편이 소개되고, 문학상 후보에 오르도록 하며, 마침내 단행본 출판의 기회를 얻게 하는 한국문학 ‘주류’의 ‘재래’적 순환구조. 이는 ‘순문학’이 분류 정의되는 형식이자 ‘장르·비등단’ 문학을 억압해온 방식이다. 그 정의 과정에 복무하는 이들이 결과적으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글’을 쓰는 비평가이기도 하다. 말자 하기로서니 “대체 한국의 문학비평가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노태훈(39)은 선행한 질문과 함께 이러한 비평 세계를 “비평의 불안”으로 이르며 양태와 활로를 톺는다. 배경은 그가 신춘문예 당선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한 2013년 이후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1917)으로부터 산출되는 근현대 한국문학 100여년사에서 실로 가장 극적인 변화들이 노정 중인 때를 새내기로서 목격하고 증언한 셈이다. 이 시기 비평(가)의 ‘불안’은 담론 자체가 아니라, 격변하는 문학의 현장, 더 정확히는 ‘나’의 현장과 ‘너’의 현장의 관계에서 초래된다. 응당 활로도 쓸모도 현장에서 구해지리라. 10년차 평론가 노태훈의 첫 책 제목으로 <현장비평>만 한 게 없어 보이는 이유다.
첫 평론집을 펴낸 노태훈 문학평론가. 23일 <한겨레>와의 대면 인터뷰에서 ‘주목하는 여성작가’를 호명할 때와 달리 남성작가는 한참을 고심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소설은 물론 텍스트로서의 지난 10년치 주요 문학 현장을 빠짐없이 ‘정독’하고 평한다는 데 책의 첫번째 미덕이 있다. 평론가의 진단에 보태자면, 2010년 전후의 장편 부각, 2015년 신경숙 표절 사건과 진통, ‘미투’가 촉발된 2016년말 이래 여성·퀴어 서사, 2020년 문학상 반발, 그리고 7년여 부단한 독립문학(플랫폼)의 실험 등을 꼽아볼 만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윤리와 문단의 윤리라는 두 축에서 한국 문학계가 새 좌푯값들을 찾아간달까. 개별적으론 그 경로에서 ‘‘남성’ 평론가가, 게다 ‘낀 세대’로서, 구실할 수 있는가 저자는 반복하여 묻는 듯 보인다. 여느 비평집과의 차이점이다.
10년 현장에서 가장 올돌한 작용점은 페미니즘일 터. 노태훈은 이내 뒤따른 백래시 등 반작용의 현장을 진단하고, 오랜 반작용의 현장에 대한 성찰과 전망을 또한 시도한다. 말인즉, 2019년 이르게 젠더 이슈에 합류한 남성작가들이 (의도 없는) “남성 인물의 곤혹스러움을 재현하는 형태”로 결국 기득권 남성(성)의 언어를 이어간다는 지적이 첫번째다. 작가 고종석의 단편 ‘이 여자의 일생’ ‘, 이기호의 ‘위계란 무엇인가’, 김경욱의 ‘하늘의 융단’ 등이 주된 근거다. 작가의 무게를 외면할 수 없는 이들이다.
두번째는, 미투 이후 문학이 “저에게 한국문학계의 성별은 남성입니다”는 고발(작가 윤이형, <참고문헌없음>, 2017)을 각기 내면화하고 함께 극복해가는 과정이라면 특히 최근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보이는) 남성작가의 활동성을 우려할 까닭은 없다는 걸 요지 삼는다. 쏠렸는지부터 볼 일이다. 2023년 전국지 신춘문예 등단자 중 여성은 72%, 2020년은 73%(문학전문 <뉴스페이퍼> 데이터 분석)로 큰 차이가 없고, 이는 노태훈이 2019년 문예지 수록 단편소설, 주요 문학출판사들의 소설 단행본 출간 내역 등을 분석한 결과인 ‘7:3’의 여-남 작가 성비와도 다를 바 없다.
문학동네가 주관하는 올해 젊은작가상(14회) 수상자 7명이 모두 여성인데 첫 기록은 2014년(5회)이었다.
중요한 질문은 이런 변화들이 문학의 지평을 넓히느냐일 것이다. 노태훈은 22일 <한겨레>에 “2020년대 들어서도 페미니즘 사조가 퀴어라는 정체성, 에스에프(SF)라는 장르와 서로 만나면서 한국문학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작가의 성별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무용해질 때까지는 유용하”다는 그의 테제는 문학이 더딜지언정 편견과 억압을 깨온 오래되고 일관된 방식에 투신한다는 점에서 귀담을 만하다.
격변기, 더 깊은 질문은 독자의 지평을 넓히느냐여야 한다. 다만 그 책임을 여성·퀴어 서사가 다 짊어맬 까닭이 없다. 문단의 폐쇄적 구조, 여성 서사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현실, 독자들과의 괴리 등을 <현장비평> 1부 ‘리허설이 없는 무대에서’ 조명하는 이유이고, 그럼에도 자기갱신해 나아가는 작품과 작가(황정은이 세 차례 등장한다)를 애정 담아 읽고 부르는 이유이겠다. 연도별로 주목한 작품들을 호명한 ‘2010년대 한국 소설 리스트.xlsx’은 “비평은 대체로 늘 불안하지만 작품에 기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노태훈이 얼마나 ‘성실한 평자’가 되고자 했던가를 보여준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동하는 문학장에서 ’남성’ 평론가가 구실할 수 있는가. 비평(가)이 당면한 현장은 가혹해 보인다. 노태훈의 10년치 목격과 자술이, 다 동의하기에 인용 표시를 부러 하지 않아도 이상할 게 없는, 이 기사의 첫 단락이다.
그리고 그는 <한겨레>에 말했다.
“문학평론은 읽고 글을 쓰는 욕망으로 출발하는데 순수한 마음만으로 이 세계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가 있는 한, 한 사람도 그걸 읽지 않게 되더라도 끝까지 남아 읽는 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에요. 가장 열심히 가장 많이 읽고 얘기하는 ‘성실한 독자’가 제 정체성입니다.”
독자의 소명으로 독자를 소구하려는 것이다. 하루 평균 한편의 새 단편을 그는 읽는다. 접근 가능한 플랫폼을 통해 한해 400편가량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