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버즈
전춘화 지음 l 호밀밭 l 1만4000원
낯선 제목의 <야버즈>는 30대 중국동포 작가 전춘화의 소설집이다. 국내 처음 소개될 뿐만 아니라–막상 길림성(지린성)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고 하는–‘조선족 엠제트(MZ) 세대’ 작가의 출현을 알린다. 국내 문단에 데뷔하여 불화, 노동, 가난, 범죄, 도끼 따위 조선족에 관한 대중 서사를 ‘홀로’ 넘어서고자 했던 1979년생 금희 작가(<세상에 없는 나의 집>, 창비, 2015)의 바통을 이어받는 사실상의 첫 작가이기도 하다. 문학작품으로만 치면 8년 만이다. 이 계보는 앙상한 것이 아니라 희귀한 것이다.
자전소설 형식의 <야버즈>를 구성한 5개 단편 주인공은 모두 조선족이다. 그간 조선족은 호명되어지던 이들이다. 한국의 도시를 구성하되 가령 ‘연변 출신’으로 경계지어졌다. 하지만 전 작가의 소설에선 호명되고 배척되던 이들이 역으로 한국의 독자를 연변으로 불러들인다. 독자가 중국동포여도 마찬가지다. 일단 ‘연변’으로 모여들어야 한다, ‘연변’적인 것들 앞에 서야 한다.
이런 말이 들려오리라.
“…저 같은 중국동포 젊은 세대들이 한국 땅에서 어떻게든 ‘야버즈의 삶’을 살아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려 내고 싶었어요… 역사든 사회든 그 어떤 거대한 것도 작은 개인의 삶을 흔들 수는 있지만 결코 압도할 수는 없는 거니깐요.”(후기)
표제작 ‘야버즈’는 한국으로 이주한 조선족 경희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허기이자 정연하게 설명될 수 없는 욕구불만을 위로하는 음식이다. 오리목뼈를 통째 입안에서 굴려가며 마지막 얇게 붙은 살을 혓바닥으로 애써 발라먹고 뼈를 내뱉는다. 국내 아직은 덜 알려진 중국 음식으로, 기술과 수고가 없으면 즐길 수 없고 기술과 수고가 요구될수록 ‘계륵’을 연상시킨다.
경희가 대학원에서 만났다 헤어졌던 한국 남자친구 기범은 야버즈 취향을 이해 못 했다. “정작 살코기는 안 먹고 머리통이나 목에 붙어 있는 고기를 뜯어” 먹냐는 것이다. 솔직(?)도 했다. “조선족들은 진짜 칼을 들고 다”니냐는 거다.
이후 만난 조선족 남편 용주(국내 대학 역사 연구원)는 일찌감치 한국으로 들어와 큰 돈을 벌고 명동과 항저우에 부동산까지 사둔 부모 덕인지 되레 현실 감각이 적다. 마침 경희의 뱃속엔 쌍둥이가 들어서는데 ‘82년생 김지영’보다 조금 더 복잡할 직장 휴직, 외국인으로서의 육아 등이 옹근 제 문제다. 야버즈를 집착적으로 훑어내는 경희에게, 더 어려운 여건에서 육아 정보를 공유해가던 고교 친구들은 말한다.
“야, 하다못해 마라탕과 양꼬치도 한국에서 정착을 했는데 우린 이게 뭐니.”
소설들은 한 편 한 편 한국 사회에 ‘정주’하려는 조선족의 지금 이야기로부터 유년의 조선족 이야기를 향해 때와 곳을 거슬러간다. ‘연변’으로 독자들을 불러 되돌아가는 길이되, 작품마다 야버즈라는 고향 음식을 통해, 우울증과 불면을 토로하며 불쑥 국제전화를 해온 고향 친구(‘낮과 밤’) 등을 통해 디아스포라라는 거대한 굴레로 ‘압도될 수 없는 작은 개별적 삶’의 형색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하여 마침내 닿게 되는 곳이 조선족, 한족은 물론 일송정과 윤동주 생가를 잇는 관광코스로 한국인들도 찾던 연변 용정의 룡두레 우물(‘우물가의 아이들’). 10대 주인공 소녀가 “아득한 곳에 부옇게 부유하는” 조선족으로서의 미래와 정체성을 바라보고 짚어보려던 곳. 초등학교 시절 조선족 친구 경매의 생존 방식과 만터우(중국 만두)를 파는 한족 아들 왕족의 생존 방식은 벌써 명료해 보인다. 더불어 그들의 세련된 ‘태도’로 각자 욕망은 속될지언정 진솔하고 반목하지 않는다.
작가에게 연변으로의 길은, 독자에게–있건 없건–기억을 공유시키는 여정으로 보이는데, 기억의 시원이 우물터다.
“그 우물가에서 자란 우리는 그저 보드기 같았다… 나는 정처 없이 앞으로만 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몸을 한껏 웅크렸다. 보이지 않는 우물의 밑바닥에 닿아 보고 싶었다. 그 밑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보면 어쩌면, 진짜로 룡이 되어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춘화 작가는 1987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태어나 연변대 조문학부 재학 중 현지 문예지에 소설을 게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수업 과제처럼 소설을 투고했다. 초등생 때 공무원 아버지가 월급날 시내 서점에서 “우리말 도서 두 권씩” 사줬다. 하지만 국가에서 운영하는 서점에 한국문학은 없었다. 헌책방 깊숙한 구석에서 신경숙 황석영을 만났다. 책 속지엔 “사랑하는 영숙아” 같은 고백들이 있었다.
그는 15일 <한겨레>에 “신기했고 한국 소설의 개방성에 놀랐다”고 말했다. 막연히 작가를 꿈꿔 대학에 들어갔으나 연변에 남은 독자는 많지 않았다. “도시락만 딱 봐도 누구네 집 엄마가 또 남쪽으로 떠났는지 알 수 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이제 도시에 남은 문예지도, 출판사도 한 손에 꼽힐 정도. 중앙대 문예창작 석사과정 졸업 뒤 국내 거주하며 창작을 지속하는 까닭이지만 그의 글은 중국동포를 먼저 향한다. 2016년 신동엽문학상을 받았던 금희 작가가 “핏줄은 같은데 살아온 배경이 너무 다르고, 기억도 참 달라요… 어느 작가도 동년 시절을 떠나 작품을 쓸 수 없어요. 그게 전부예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아무리 써도 나는 조선족 작가구나, 한국 작가가 될 수 없구나 생각했어요”(<채널예스> 인터뷰, 2015년 12월)라고 말한 배경과 닮았다.
전 작가의 첫 국내 출간을, 연변에서 활동하는 “7080 작가들이 크게 기뻐해 줬다”고 한다. 많지는 않지만 “라이벌이 아닌, 함께 문학을 지켜가려는 동료들”. 금희 작가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 첫발을 뗀 전 작가의 말이다. “조선족에 대한 기사는 악플까지 다 보는데 예전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파했는데 이젠 되물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어떤 태도가 서로에게 필요할까… 작가로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대변해보고 싶거든요.”
기억의 창조와 공유가 그 방식이고, 조선족 작가의 것이기에 한국 사회의 기억이 더 풍요로워지는 격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