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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배신자가 되겠다는 비뚤어진 여자아이들을 보라

등록 2023-03-17 05:00수정 2023-03-17 16:58

사랑의 꿈

손보미 지음 l 문학동네 l 1만6500원

손보미 작가가 5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10대 전반의 여자아이다. 이들은 다소곳하지 않다. 엿듣고 엿보고 속이고 들쑤시고 집을 나간다. 어른에게 덫을 놓고 상처를 준다. 막상 아이들의 거처는 예외 없이 중상층 내지 교양을 갖춘 가정이다. 가령 아이 앞에서 흡연은커녕 라이터도 켜지 않는 가장의 집. 그래서 읽을수록 닥쳐오는 질문은 ‘그 집 아이들이 왜, 어쩌다?’일 테지만, 작가의 시선은 ‘그 집 아이들이 어떻게?’에 잡혀 있다. 어떻게 나긋하지 않은지, 그때의 정동은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지 집요하고 세밀하게 활자로 ‘그려낸다’. 프랑스 여성 소설가 아니 에르노가 평생 그러했듯, 1인칭 시점이 될 수밖에 없다.

외삼촌 부부에게 맡겨진 10살 ‘나’는 불면이 생겼고 말을 잃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감정도 표출되지 않는다. 외숙모는 “외상후 스트레스”라고도 “병든 닭 같”다고도 했는데, 나는 집이나 학교에서도 맞닥뜨리는–적당한–관심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외숙모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미친 여자’라며 늘 험담했던 동네 가게 여성에게 나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하고, 감정을 들추고 또 들킨다. 그러나 어떤 중대한 과거는 거짓이고, 중대한 감정은 자초한 것이다. 가게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어디론가 데려가 달라고 사정한 끝에 이뤄진 일이 ‘가게 여자의 아이 납치 소동’으로 종결되었으니, 어른들의 과거(기억)는 여전히 거짓이다.

작품집 첫 단편 ‘밤이 지나면’(2019)은 외삼촌의 장례를 계기로 떠올리는 ‘나’의 소싯적 한철을 배경으로 한다. 부모는 막 이혼했고 외삼촌 부부는 아들(외사촌)과 갈등 끝에 남남처럼 지내던 때. 지나고 보면 사진 한 컷과 다름없을 찰나는 극히 어둠을 두려워하던 아이의 무의식과 의식 사이 증오, 공포, 패배, 수치 따위로 한가득 격동한다.

손보미 작가. 2020년 장편소설 <작은 동네> 출간 뒤 <한겨레>와 인터뷰 중.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손보미 작가. 2020년 장편소설 <작은 동네> 출간 뒤 <한겨레>와 인터뷰 중.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여자아이의 언뜻 무질서한 정동은, 기성질서 속 균열이자 좌절의 기표(‘해변의 피크닉’, 2020), 스스로 정화해 거듭하는 성장의 기의(‘불장난’, 202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되기도 한다.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증거들.

이 소설의 효용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여자어른의 3인칭 관점으로 쓰인 ‘사랑의 꿈’(2019)에서 여자어른들은 말한다. “애들은 정말 성가셔요. 쓸데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잖아요. 가끔씩은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죠?” 과연 여자어른의 말일까.

손보미 작가(43)는 동세대 중 수상 작품만으로 두툼한 책을 짤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이다. 독자와 만난 바로 전작은 탐정물 장편(<사라진 숲의 아이들>, 2022)이었다. 그가 또 넓힌 지평 위에 호기심 가득, 비틀대는, “커서 배신자가 될 거”라는 비뚤어진 여자아이를 세웠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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