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장은영 soobin35@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불신당하는 말
권력은 왜 피해자를 신뢰하지 않는가
데버라 터크하이머 지음, 성원 옮김 l 교양인 l 1만9000원
‘미투 운동’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강요된 침묵 아래 묻혀 있던 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미국에선 ‘성적 괴롭힘’의 정의가 확장되고 관련 제소 기한이 연장되는 등 꿈쩍 않던 제도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버라 터크하이머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프리츠커 로스쿨 교수는 초창기 성공 이후 “제도와 그 제도를 둘러싼 문화를 개선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거의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을 “허위 고발”이라며 신뢰하지 않는 한편, 가해자를 “무고하다”고 감싸는 구조가 여전히 중력처럼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당하는 말>은 피해자에겐 박하게, 가해자에겐 후하게 작동하고야 마는 이 구조의 실체를 ‘신뢰성’이란 개념으로 톺아본 책이다. 지방 검사로도 일한 경력 위에 쌓아올린 전문지식을 가지고, 터크하이머는 실제 사례와 연구 결과들을 엮어 문제의 핵심을 파고든다. “신뢰성 문제의 핵심은 권력”이며, 권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가혹한 의심의 대상이 된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말, 그중에서도 유색인종, 빈민, 장애 등으로 더 ‘주변화’된 여성의 말이 그렇다. “위계질서가 만연한 사회에서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때문”이다.
‘신뢰성 구조’의 동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공유하는 의미 시스템”으로서 ‘문화’다. 문화의 힘은 너무도 강력해서, 심지어 성폭력 생존자마저도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다른 하나는 “공동의 가치와 태도를 빚어내는” ‘법’이다. 문화와 법 안에서 불균등하게 분배된 힘의 집합체인 신뢰성 구조는 “우리의 판단력을 오염시켜서 고발인의 신뢰성을 폄하하고 피고발인의 신뢰성을 과장하기 쉽게 만든다.” 이는 “(누군가가) 멍청하거나 순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권력 우위에 있는 남성의) 진술을 신뢰하는 문화와 법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신뢰성 구조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함께 이 위계질서가 허용하는 성적 특권을 보호한다.”
2018년 미국 오하이오대학 내 여성센터 등 여러 단체들이 협력해 개최한 ‘그때 뭘 입고 있었니?’ 전시회. 성폭력 생존자들이 성폭력 당시 자신이 입고 있었던 옷을 전시함으로써 ‘피해자가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취지로 미국 전역의 여러 대학에서 열렸던 전시회다. 유튜브 갈무리
데버라 터크하이머.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누리집 갈무리
가부장제에 뿌리를 둔 문화와 법은 편향된 고정관념들로 절여져 있다. ‘순결한 피해자’ 여성이 ‘짐승 같은 가해자’인 낯선 남성에게 어두운 골목 같은 곳에서 있는 힘껏 저항했는데도 심한 육체적 폭력에 못 이겨 강간을 당한다는 식의 ‘비면식범 강간’ 패러다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아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의 비율이 훨씬 높고, 피해자들은 저항조차 못 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트라우마 때문에 그 기억이 뒤죽박죽이기 일쑤인 등 실제 현실은 이런 고정관념들과 아예 정반대다.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신뢰성 구조는 단지 가부장적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말들을 의심하고 무력화시킨다.
신뢰성 구조는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말에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잘못이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는 뜻이 담긴다. 신뢰성 구조는 이에 대해 각각 불신, 비난, 무시라는 ‘폄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잘못이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성폭력 혐의가 아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사전’에 작동하기도 한다. 이 문화와 법 아래 자신의 고발이 묵살될 수 있음을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생존자들이 불신·비난·무시를 당하느니 그저 침묵을 택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가지고 각각의 층위에서 신뢰성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세히 드러낸다. 성폭력 고발에 대해 수사기관은 자신들의 선입견과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고발인의 신뢰성을 더 강하게 의심하고, 곧잘 ‘사실무근’이라며 수사를 종결해버린다. 그러나 연구 결과 ‘허위 신고’의 비율은 단지 5%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고발인에 대한 불신은 법으로도 공식화되어 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증언을 입증할 ‘추가적인 확증’ 요구, 사건이 일어난 뒤 ‘즉각적인 신고’ 요구, 고발인 여성의 증언을 판단할 때 각별히 ‘경계’하라는 지침 등은 1962년 미국법률협회가 만든 <모범형법전>에 담겨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판 전 증거 개시’는 고발인 여성의 정신 건강, 성적 이력, 가족사 등을 낱낱이 파헤쳐 신뢰를 떨어뜨리는 도구로 쓰인다.
‘미투 운동’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강요된 침묵 아래 묻혀 있던 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2019년 한 유명 인사의 성추행 혐의를 비판하고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모습.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그 일이 일어났다’가 인정되더라도, ‘네 잘못이야’가 작동한다. 남성의 ‘섹스할 권리’를 인정하는 한편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다며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사건 당시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묻는 등 ‘걸레’라는 딱지는 고발인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자발적으로” 술에 취한 여성과 맺은 성행위에 대한 책임을 남성에게 묻지 않는다거나, 피해자가 ‘달갑지 않음’을 제대로 보여줬는지 여부를 따지는 등 법 또한 이를 돕는다. 성폭력 고발인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는 ‘그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신뢰성 폄하에서 온다. 성적 괴롭힘의 경우 80년대까지만 해도 이를 문제 삼을 법적 수단 자체가 없었고, 민권법 위반으로 다루게 됐을 때에도 법원은 “심각하거나 만연한” 수준일 때에만 법적 조처가 가능하다고 했다. 금융가, 팝 스타는 성폭행 가해자일지라도 관심과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흑인 소녀 등 피해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형편없는 취급을 받는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중요하지 않을 때, 당신 자신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친구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 공적인 기관으로부터도 배려받지 못하는 ‘2차 피해’까지 겪게 된다.
지은이는 “우리의 의사 결정을 왜곡하는 영향력을 직시함으로써 누가 신뢰할 만한지 판단하는 데 더 나은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뢰와 책임과 관심이 권력의 축을 따라 할당되는” 이 체제의 작동을 문제시함으로써 신뢰성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데 나서자는 것이다. 생존자들이 그토록 바라는 인정·지지·연대를 누릴 수 있도록, 한 개인의 차원에서 출발해 문화적 진전 및 법제도의 변화로까지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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