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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연민도 과장도 없이 도달한 40대 성장소설

등록 2023-03-10 05:00수정 2023-03-10 10:25

비등단 데뷔 14년차 문지혁 작가
자전소설 속 ‘일상의 비일상화’

웃긴데 슬프고 겸손해서 당당해
이다지도 한 호흡에 읽히는 소설

중급 한국어
문지혁 지음 l 민음사 l 1만4000원

이 소설을, 놓치기 십상이었음에도,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오토픽션(자전소설)인 만큼 장편의 주인공 ‘1980년생 문지혁 작가’의 이력을 먼저 따라가 보자. 작가는 신춘문예에 꽤 응모했으나 당선된 적이 없다. 통상의 등단 이력이 없다. 작품 수는 꽤 된다. (문단에선 이런 작가를 ‘무면허 작가’라 부르곤 한다.) 그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빛을 보게 된 첫 소설(SF)엔 이런 독자 서평이 붙었다. “조잡하고 애매한 소설이며… 주제 실종에 무엇보다 더럽게 재미가 없습니다.”

그가 스무살 즈음 처음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매사 “보통 일이 아니네” 속태우던 엄마를 매사 “별거 아냐” 무심하여 불 지르던 아버지조차 보통 일이 아니라는 듯 던진 말. “그래, 그럼 직업은 뭘 가질 거냐?”

아버지의 질문 덕분인지 작가는 대학 강사가 된다. 대한민국 여느 강사처럼 1시간 4만5000원을 받으며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8)을 교재 삼기도 한다. 위선적 인물 구로프는 구 ‘프로’나 되는 듯 바람을 피우고 다니다 젊은 유부녀 안나를 만나 마침내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 ‘불륜을 미화해 불쾌하다’ ‘소설 자체가 역겨웠다’는 근래 대학생들에게 강사가 문학의 의미를 더해본다.

“소설이란 윤리로 비윤리를 심판하는 재판정이 아니라, 비윤리를 통해 윤리를 비춰 보는 거울이자 그 둘이 싸우고 경쟁하는 경기장이 아닐까요?” “이제 여러분이 안나의 이야기를 써야 할 때(예요)”

한 학생의 이윽고 종강 평가. “여혐 가득한 빻은 텍스트를 골라 놓고서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수업.”

이쯤 되면 궁금할 만하다. 소설을 쓴 문지혁 작가와 소설이 된 ‘문지혁 작가’는 어디까지 일치할까. 명확한 건 플롯이 생애와 열차 궤도처럼 일렬 지어 있다는 점이고 그때 중요한 건, 그 궤간 거리일 거다. 일기에 쓰여진 당신이 일기를 쓰는 당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삶이질 않는가.

문지혁 작가는 ‘문지혁 작가’에게 말했다. “나도 나지만, 더 안 풀린 지혁이다. 좀 더 가혹하게 내몰았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한겨레>와의 8일 전화 인터뷰)

하지만 어느 문지혁도 자기비하나 좌절로 점유되지 않는다. 정결한 문장과 기만을 배제한 기교적 구성으로 당도한 지점은 이렇게 서술되어야 맞겠다.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하나 들뜨지 않고, 웃긴데 슬프고 겸손해서 당당한 40대의 성장소설. 이다지도 한 호흡으로 읽힌 소설이 근래 있나 싶다, 하나의 장르처럼.

2010년 단편 ‘체이서’와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문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다.

2010년 데뷔한 문지혁 작가. ⓒ윤관희, 민음사 제공
2010년 데뷔한 문지혁 작가. ⓒ윤관희, 민음사 제공

주인공 문지혁이 미국서 대학원을 마친 뒤 현지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다 귀국한 2013년부터 <중급 한국어>는 시작된다. (전사는 2020년 장편 <초급 한국어>에 작가와 작중 인물의 일치성이 더 높은 수준으로 담겨 있다) 어머니 납골당에 들르고, 결혼을 하고 대학 강사직을 얻는다. 어렵사리 첫째 아이도 생긴다. 준비한 만큼, 대학 수업은 정연해 보인다. 다만 ‘시간강사’이고, 다만 등단하지 못했으며, 다만 창작의 성과가 미약할 뿐.

소설의 가장 차별적 매력은 이 ‘범상성’에서 비롯하리라. ‘비극 없음’이라는 ‘비극’을 견디며 일상에서 길러내는 삶의 의미들. 자신이 가르치는 소설의 이론, 실재로서의 문학 작품들과 인물, 그리고 최초 기억, (엄마의) 죽음, 결혼과 사랑, 다툼과 실패, 아이의 출생 따위 현실 속 한 생의 국면 국면을 교직시켜 자신과 소설이 그 의미들을 자양분 삼거나 그 의미 자체가 되어 성장해감을 말갛게 보여준다.

작가가 돋을새김한 ‘일상’은, 작가가 강사로서 수업 중 강조하는바 ‘일상→(극적) 비일상→일상’이라는 이탈과 귀환을 통해 A가 A′가 되어가는 소설의 원형적 구조와도 배치된다. 그는 <한겨레>에 “수업 때 가르치는 이론들을 스스로 배반하는 지점인데, 실제의 나와 구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로 일상 공간에서 (소설을) 풀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착해내는 거다.

“되풀이란 무엇일까. 아이는 왜 ‘왜?’라고 계속해서 묻는 것일까? 지긋지긋하지만 되풀이야말로, 아니 지긋지긋한 것들만이 삶과 사람과 우주의 본질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 주는 것 아닐까?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

초급, 중급에 이어 혹여 문 작가가 ‘고급 한국어’를 쓸 즈음, 작가도 소설 속 문지혁도 또 다른 생애의 지점에 닿아 있을 법하다. 50대 성장소설이 된대도 작품의 바닥 온도가 변하진 않을 것 같다. 그가 ‘일상’을 껴안는 태도 덕분인데 실은 그가 껴안은 일상 세계의 온도가 딱 그러한 덕분이다.

후기 나무들 잘라 소설을 내야겠냐

문지혁 작가는 2010년 첫 책을 낸 뒤 한동안 자신을 “가장 괴롭힌 것”은 등단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이라고 했다. 수차례 도전했을 뿐 아니라, 등단하려는 후학에게 글쓰기 비법을 가르치는 이질 않은가. “계속 쓰지만 비평적으로 조명되지도, 팔리지도 않는다면 나무들 잘라 책 만드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소설 그만 쓸 각오로 문학상 응모한 작품이 <초급 한국어>지만, 낙선했다. 당시 문 작가는 이미 데뷔 10년차. “부끄러워서” 출강하는 대학들의 이름 한 자씩을 따서 ‘한동원’이란 가명으로 응모했다. <중급 한국어>에서 유머가 각별한 이유는, 자신의 ‘일상’을 ‘비일상’으로 과장하거나 연민하지 않는 장치로도 구현되는 덕분이다. 현실 속 작가와 소설 속 작가의 궤간, ‘일상의 비일상화’를 꾀하는 듯 일상과 비일상의 거리를 유지해내는 장치랄까. “계량화는 어렵지만 이야기의 50%는 허구입니다.”

하지만 다음은 모두 진짜다. “(지난 시절) 문단 바깥 사람으로 인식되면서 비평을 받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불공평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마지막 작품이라며 썼던 <초급 한국어>부터 비평을 해줬다”는, “최근 몇 년은 등단, 비등단의 문턱이 희미해지고 있어 바람직하다고 본다”는 작가·교육자로서의 말. 문 작가는 지난해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을 받았지만, 이번 책 작가정보에서 수상이력을 일부러 뺐다고 했다. 매주 쏟아지는 신간 사이에서 이 소설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수상작품집도 읽었던 나 자신을 얼마나 책망해야 했을까.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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