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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쉬리>(1999)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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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영화의 모든 것
김형석 외 7명 지음,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l 앨피 l 2만1000원 70~80년대 ‘암흑기’를 지나며 ‘방화’(邦畵)라 불릴 정도로 한국영화의 미래는 암울했다. 그랬던 한국영화가 오늘날 전세계를 무대로 뛰어난 성취를 자랑하게 된 궤적을 좇으면, 그 출발점에 90년대가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1990년대 한국영화>는 김형석(총론), 김경욱(영화장르), 장병원(영화미학), 이도훈(독립영화), 김혜선(배우), 정종화(영화문화), 김익상(영화기술), 허남웅(영화인 인터뷰) 등이 필자로 참여해 90년대 한국영화를 종합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90년대 한국영화의 성취를 통계로 확인하긴 어렵다. <쉬리>(1999)가 ‘메가 히트’를 기록했던 1999년(39.7%)을 제외하면 1990~1999년 한국영화 점유율은 20%대에 머물렀고, 총 관객 수 역시 10년 내내 4천만~5천만명대를 유지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이 10년 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르네상스’의 밑돌을 놓았다. “감독이 이런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 영화사 사장이 그래 한번 해봐, 그걸로 기획 끝”이었던 90년대 초반, “어떤 소재를 왜 선택하여 어떤 방식으로 누가 만들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는 ‘프로듀서 중심의 영화 제작’이 처음 등장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에서 출발한 이 ‘기획영화’ 흐름은 <결혼이야기>(1992) 등을 거치며 새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결혼이야기>는 대기업(삼성전자)이 제작비의 절반을 제작 전에 투자하는 방식을 처음 도입했고, <은행나무 침대>(1996)는 금융자본과 한국영화가 만나는 시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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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획영화’로 만들어진 <결혼이야기>(1992)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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