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지음, 이영아 옮김 l 현암사 l 1만8000원 고지식한 성직자, 옥스퍼드대를 나온 우월 의식에 처음 맡은 교구 지역(이스트 런던) 빈민가 사람들을 “하층계급”이라 부르며 혐오했던 이, 제 가난을 레닌 탓으로 돌리며 툭하면 딸을 훌닦던 성마른 성격의 남자. 신부 찰스 헤어의 진면모다. 소설 1부를 차지할 정도의 이 긴 할애를 일단 눈여겨봐 두자. 정작 장편의 주인공은 신부가 아닌 그의 딸 도로시니까. 아버지를 대신해 교구 살림에 대부분 시간을 쏟아붓는, 자유당과 보수당의 차이도 알지 못하는, 그저 신실한 여성. 흐름은 도로시가 성추행을 당한 이튿날로부터 격변하는데, 설명 없이 도로시가 거리에서 깨어나며 소설은 2부를 연다. 신문을 통해 나이 많은 화가와 눈이 맞아 가출했다는 신부의 딸 소식이 추문으로 전해지나, 도로시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 채 런던 부랑자들과 구걸, 도둑질, 싸구려 착취 노동에 이르기까지의 밑바닥 생활을 함께 치른다. 그러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으며 친척의 도움으로 교사가 되지만 교장과 갈등을 겪고 거듭 ‘신부의 딸’로 회귀하는 과정이 이후의 줄기다. <동물농장> <1984>의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의 두 번째 소설이자 유일하게 여성이 주인공인 1935년 작품 <신부의 딸>이다. 국내엔 처음 번역 소개된다. 오웰의 소설 가운데 가장 ‘오웰답지 않다’ 할 법한데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1946,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이라던 그의 신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말을 상기할 때 이 소설은 정말 오웰답지 않아진다. 길게 할애해 몰아붙이는 종교의 몰염치, 엘리트의 허위의식, 가난의 실체, 신앙의 공허 등과 동시에 유머나 치정 따위가 또 소설을 치대는 탓. 도로시는 신부의 딸로 돌아오되 내면의 신앙을 버린다. 이 경로는 “고약한 양심의 가책”으로 영국 식민지 버마(미얀마)에서 맡았던 경찰직(1922~27)을 버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 부랑자의 삶(1928~29)으로 단연히 들어가고, 고교 교사(1932)가 되기도 했던 오웰 자신의 생애 전반부와 무척이나 겹친다. 47년 짧은 생의 오웰은 오웰로 모순된 적이 없다.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나는 왜 쓰는가>)는 말대로, 이 소설만큼의 정치성도, 이 소설만큼의 장식도 오웰에겐 그저 나태함이고, 스스로 추궁해야 할 전반의 생애였던 셈이다.
아들과 함께한 오웰의 모습. 1945년. 사진 버넌 리처즈. 반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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