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학술적인 연구를 담은 책을 볼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새로운 개념들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파고들어간 학자들은 나름의 사유로써 그것의 보편적 본질을 풀어헤치고, 그 결과를 개념으로 응축해 담아냅니다. 한국 근현대사 속 비규범적 존재들을 다룬 <퀴어 코리아>에서 만난 새로운 개념들을 새겨봅니다.
“우리는 미래가 없이 살고 있다. 그게 기묘한(queer) 일이다.” 일기에 쓴 버지니아 울프의 이 문장으로부터,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은 ‘미래’와 ‘퀴어’를 엮어냅니다. 에델만은 여기에서 ‘아이’라는 기표, 곧 미래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이성애와 그에 복무하는 섹슈얼리티에 특권을 부여하는 ‘재생산 미래주의’를 추출합니다. 가족과 국가가 강요하는 이 강고한 재생산 미래주의 아래에 동성애 등 ‘미래를 낳지 못할’ 비생산적인 것들은 배제되고 억압됩니다. 이를 비판하는 에델만은 미래를 가리키는 어떤 희망도 거부하고 ‘죽음 충동’(주이상스)을 충실히 따르는 길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재생산 미래주의는 생산이 거듭될 단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성을 제시하지만, 다가올 미래는 현재에 이미 구축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서사에 붙들리지 않는 퀴어는 ‘퀴어 시간성’의 가능성, 곧 또다른 미래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퀴어 이론가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는 퀴어 시간성에 대한 통찰로부터 ‘퀴어’와 ‘유토피아’를 엮어내는 길을 제시합니다. “만일 이성애-선형적 시간이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여기와 지금 이외에 어떠한 미래도 없다고 말한다면, (…)퀴어성은 유토피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것에는 퀴어한 무언가가 있다.”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
한국 최초의 퀴어 영화 중 하나인 <내일로 흐르는 강>(1995)의 포스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