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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프랑스 서점서 네발로 기며 한국 시를 찾아읽다

등록 2023-02-17 05:00수정 2023-02-17 14:27

파리8대학 전 교수 클로드 무샤르
한국문학 선구적 평가, 유럽에 알려

한국문학 비평·뒷얘기 국내 첫소개
“언제나 한국의 관대함을 느꼈다”
클로드 무샤르(맨 왼쪽)가 2010년대 전후 국내 방문 중 한국 문인들과 찍은 사진. 역자 통해 본인 제공
클로드 무샤르(맨 왼쪽)가 2010년대 전후 국내 방문 중 한국 문인들과 찍은 사진. 역자 통해 본인 제공

다른 생의 피부
오를레앙, 파리, 서울 그리고 시
클로드 무샤르 지음, 구모덕 옮김 l 문학과지성사 l 1만4000원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쳤던 클로드 무샤르(82)는 한국문학, 그 가운데서도 시를 선구적으로 유럽에 알린 이다. 그 시기가 고작 1990년대 후반인가 반문할 수 있겠으나 2010년도 삼성을 일본 기업으로 아는 서구인들 투성이(미국인 42%였다)였던바, 그가 없었다면 한국문학이 서구 문단에서 포착되는 데 몇 년은 더뎌졌으리라.

시인이기도 한 무샤르는 자신이 편집하던 시 계간지 <포에지>에서 1999년 기획한 ‘한국 시 특집’호로 이상, 고은, 황동규, 이성복, 기형도, 조정권, 송찬호 시인을, 2012년엔 불문학자 정과리, 비교문학 연구자인 주현진 번역가와 공동 편집해 27명의 시인, 소설가 이인성, 감독 이창동 등을 통권호로 소개했다.

두 차례의 도전적 기획을 성공리에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과 작가들에 관한 자신의 말, 판단, 행위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에 갇혀 있을 때 김혜순 시인이 했다는 말을 무샤르는 자주 곱씹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의심의 결과, 그 믿음에 대한 무샤르의 응답이 결국은 카프카, 미쇼, 카네티와 함께 20세기 ‘변신’의 작가군에 포함한 이상의 시론, 그외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 김혜순, 나희덕, 신경숙, 이인성의 작품론이고, 특히 각별했던 관계의 이청준 인물론이겠다.

<다른 생의 피부>는 무샤르의 첫 국내 번역서로, 한국 문인과 작품에 대한 융숭한 에피소드와 섬세한 비평 따위 그의 20여년(2000~21년) 발표·미공개한 글이 아울러 있다. 한국 방문이 잦아 프랑스 지인들이 “너는 잠시라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사라져버리는구나”라고 말했을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그의 서랍 속 글들까지 프랑스 국립동양어문화대에서 강의하고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구모덕씨가 “흩어지는 목소리를 모으는” 듯 함께 추려 옮긴 것이다.

정과리 교수(연세대)는 그에 대한 찬사와 함께 2012년 무샤르와 김혜순 시인의 만남이 “시인의 세계적 위상에 밑거름으로 작용한 게 틀림없다”(추천사)고도 말한다. 국내 최초로 영국 왕립문학협회 선정 ‘국제작가’에 이름 올린 이가 김혜순 시인이다.

프랑스 문단에서의 한국문학에 대한 선도적 평가가 유럽에 미친 영향을 짐작시키지만, 바야흐로 책이 주는 감동은 그의 밝은 눈과 헌신에만 있지 않다.

더불어, 언어의 장벽, 문화의 위계를 허문 채 ‘변방의 문학’을 대하는 노교수의 견고한 윤리. 이 윤리는 (세계) 문학의 현재를 향유하는 자유와 포용성, 문학의 무한성을 추구하는 겸손과 전위성이라 바꿔 말해도 좋으리라. 편견은 지식이 아닌 태도로 제척된다.

무샤르는 “언제나 한국의 관대함을 느꼈다. 관대함은 줄 수 있는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힘이다. 200년 전,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우리는 우리가 준 것을 받는다’라고 말했다”고 썼지만, 사실 68혁명 이후 세워진 대학(개교명 뱅센 실험대학으로 진보적 학풍이 여전하다)의 문학 교수로서 그가 문학과 삶에서 견지한 태도야말로 그러해 보인다. 진취적 대학에서도 “20여년 교직생활 동안 한국 학생을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가, 1990년대 하나둘 수업 중 만난 수줍던 한국 학생들이 소개한 시인이 바로 무샤르를 사로잡은 이상과 기형도였다. 이상이 누구인가, 아니 프랑스가 그에게 무엇이었나. 20세기 초 프랑스의 초현실주의가 제국 일본을 기착하여 마침내 이상에까지 파급된 바 없지 않다.

자유, 포용, 전위가 윤리라면, 실천은 번역일 것이다. 무샤르의 번역에 관한 사유는 올돌하다. 그가 토로한 ‘자기 의심’도 이 언어와 저 언어의 경계에 산재한 ‘크레바스’에서 발생했음에 틀림없다. 가령, 번역된 시는 본래 쓰인 시인가. “내가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시를 읽는 독자로서밖에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 그러한 이유에서 그간 읽은 시들을 한국어로 다시 읽으면 내가 느낀 감상들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원초적 공포. 그러면서도 “인터넷이나 파리에 있는 서점 곳곳을 뒤지며, 파리 소르본 대학 근처 라르마탕 서점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거나 네발로 걸으며, 한국 시를 찾아” 읽었다(2008년 글)는 그다.

무샤르는 경험을 반추하여 “두 사람이 함께 기형도를 번역한다는 것은 두 개의 언어, 사회 역사적 공간, 전통 사이에 있는 무엇인가를 움직여 번역시 내부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한국문학을 매질 삼아 무샤르 본인의 조국과 고향(오를레앙)으로까지 투사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지경이다. 폴 발레리가 “시는 나쁜 번역도 견디어낸다”고 말한 까닭이요, 무샤르가 “프루스트에서 포크너, 이청준에서 이인성. 가장 혁신적인 소설들을 읽을 때, 우리는 이야기의 흐름에 더는 매몰되지 않는다. 수직적인 독서를 경험하고, 책의 한 구절에 잠시 멈춰 몇몇 문장들이 발현하는 시적 힘을 만끽하기도 한다”고 새긴 까닭이다.

무샤르는 역자를 통해 <한겨레>에 ‘20세기 증언문학’ 주제의 신간을 준비 중이고, 한국 문학작품 또한 주요하게 다뤄질 계획이라고 전해왔다. 문학 이전의 역사와 삶이 문학 넘어 건너가게 되는 셈이다.

프랑스 시 계간지 &lt;포에지&gt;의 한국문학 특집 통권호 표지(2012년 봄호). 정현종 시인이 직접 쓴 “시”. 문학과지성사 제공
프랑스 시 계간지 <포에지>의 한국문학 특집 통권호 표지(2012년 봄호). 정현종 시인이 직접 쓴 “시”. 문학과지성사 제공

클로드 무샤르가 국내 한 사찰의 마루에 앉아 글을 적고 있다. 본인 제공
클로드 무샤르가 국내 한 사찰의 마루에 앉아 글을 적고 있다. 본인 제공

클로드 무샤르가 2010년대 전후 전북 김제 금산사를 방문해 찍은 사진. 본인 제공
클로드 무샤르가 2010년대 전후 전북 김제 금산사를 방문해 찍은 사진. 본인 제공

후기 리듬의 번역, 기쁨의 번역

재불 번역자 구모덕은 2016년 김혜순 시인의 <슬픔치약 거울크림>을 프랑스에 번역 소개하며 무샤르와 인연을 맺었다. 무샤르가 한국문학에 관해 2000년부터 기록해온 “방대한 분량”의 글 가운데 20편, 그 가운데 또 11편을 함께 추렸다. 번역은 쉽지 않았다. 구씨는 <한겨레>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무샤르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작품 인용 대목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대신 한국작품의 원문을 찾아 인용했다”면서도 “당연한 선택일까” 되물었다. 늘 마땅할 순 없단 얘기다. “원문과 번역본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두 텍스트가 얼마나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 알”게 되는 탓.

그가 김혜순 시집을 번역할 땐 시인의 당부대로 ‘리듬의 번역’을 목표했다. “각 언어, 각 작가, 각 작품이 가지고 있는 리듬이란 결코 같은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번역은 저자와 역자, 텍스트와의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어떤 고유한 세계의 리듬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에선 하나의 목표를 더했다. “한국에서 쓰고 읽은 작품을 프랑스어로 발견한 무샤르의 기쁨, 그 기쁨을 다시 한국어로 나누는 일, 그리고 무샤르의 말을 한국어로 옮기는 기쁨”을 ‘번역’하겠다는.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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