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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전다시읽기]현실을 응시하라 슬픔을 직시하라

등록 2006-03-09 20:48수정 2006-03-10 17:39

다섯편의 ‘새로운 이야기’인 <금오신화>에 그려진 인간세계는 매우 부정적이고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함세계를 직시하고 슬픔을 이겨낼 힘을 발견한다.
다섯편의 ‘새로운 이야기’인 <금오신화>에 그려진 인간세계는 매우 부정적이고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함세계를 직시하고 슬픔을 이겨낼 힘을 발견한다.
여말선초 결함 많은 세계에 사는 주인공들
환상공간으로의 여행 통해 현실의 무게 자각
완전한 가치 실현하지 못하는 슬픔 느끼지만
초월 꿈꾸는 현실도피 대신 자기혁신 요구
다섯편 '새로운 이야기' 구조 탄탄 주제의식 심오

고전 다시읽기/김시습 <금오신화>

최근 창작을 하거나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여러분들로부터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정말 대단한 소설이라고 평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탁월한 연출가이신 어떤 선배는 <금오신화> 가운데 ‘이생규장전’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 작품을 정극(正劇)으로 상연하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수능과 논술 시험에 대비해서 읽기는 하였지만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럴까?

<금오신화>는 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인 김시습(1435~1493)이 ‘풍류기어(風流奇語)’ 다섯 편을 창작하여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금오’는 경주 남산을 가리킨다. ‘신화’는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전등신화> 등 당시에 읽히던 기존의 전기소설(傳奇小說)과는 다른 소재와 발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엮었다고 밝힌 것이다.

내가 아는 분들이 <금오신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한결같지는 않다.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도 각각 소재와 주제가 다르다. 하지만 그 분들은 대체로 <금오신화>가 인간 김시습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고, 작품 속의 이야기 구조가 매우 탄탄하며, 인물의 형상이 뚜렷하고 주제사상이 심오하다는 점을 수긍한다. 사실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불변의 사랑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노래하면서도 그것을 분쇄하려 드는 운명의 불가피성을 담담하게 그려 보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고전소설보다도 삶과 이승이 죽음과 저승의 담론을 통해서 그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그려내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죽은 자임을 연습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이야말로 가장 철학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수능 대비용 고전은 아니다.

<금오신화>는 16세기 중엽에 목판으로 간행될 때부터 다섯 이야기였다. 이 책은 윤춘년(1514~1567)이 교서관 제학을 겸하고 있을 때 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써, 더 많은 작품이 있었을지 모르나, 1999년에 발견된 초기 목판본에도 다섯 편밖에 들어 있지 않다. 그 다섯 편이 완결성을 지니거늘, 더 많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현실 떨쳐 일어난 자유인

김시습은 자유인이요 방랑자였다. 비록 경주 남산이나 서울 동쪽의 수락산에서, 혹은 관동의 한 산자락에서 일시 정착하였지만, 의식은 정태적이지 않았다. 결함세계를 응시하여 우울해하고, 또 떨쳐 일어섰다. <금오신화>에서도 그는 현실공간을 벗어나 상상의 세계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상상 세계의 여행도 달콤하지는 않았다. 일체의 가치가 훼손된 결함세계를 응시하는 자만이 갖는 우울감이 이 소설집에 담겨 있다.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모두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였다. ‘만복사저포기’는 고려 말 왜적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였고, ‘이생규장전’은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배경으로 삼았다. ‘취유부벽정기’는 옛 도읍 평양을 무대로 삼아, 풍경 속에 민족사의 흐름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남염부주지’는 조선 초에 유행한 지옥의 관념을 소재로 삼으면서, 현실의 악(惡)의 상태를 고발하였다. ‘용궁부연록’은 개성의 박연폭포에 연관된 용 전설을 소재로 삼았다. 또한 다섯 이야기는 민간의 전승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남염부주지’에서는 박생이 염마왕으로 취임하는데, 이것은 속세의 인간이 염라왕으로 된다고 믿는 신앙을 빌려 온 것이다. ‘용궁부연록’에 등장하는 조강의 신, 낙하의 신, 벽란의 신은 조선 민중들에게 친근하였던 수신(水神)들이다.

김시습의 초상화.
김시습의 초상화.
김시습은 개인의 본래성을 구현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사회 현실의 문제를 응시하여, 그 자각에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소설 속에 담아내었다. 그렇기에 <금오신화>에 그려진 인간세계는 대단히 부정적이고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이다. 하지만 소설속의 인물들은 현실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오신화>는 이승이든 저승이든, 속세든 용궁이든, 실재하는 현실 공간이든 상상 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상징의 공간이든,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원만구족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였다. 어쩌면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귀신·염왕·용왕·염부주·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현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용함으로써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섯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결함세계 속에서 생활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다.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만복사저포기’의 이생·양생·홍생은 물론,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박생·한생도 범부일 따름이다. 아니, 범부가 아니라, 본래는 지극히 통속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신비한 체험을 한다. 그들은 환상 공간으로의 여행을 통하여 오히려 현실의 무게를 깨닫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현실성을 자각하게 된다. 결함세계 속에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완전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슬픔을 느끼는 존재들이며,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슬픔을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자각은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부추기지 않는다. 초월적 세계를 동경하여 그쪽으로 나아가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살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 혁신의 고투를 개개인에게 요구한다.

‘세조 왕위찬탈’ 비판 녹아

소설 속의 그러한 주제는 김시습 자신의 삶이나 사상과 연관이 깊다. 김시습은 결함세계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마음만 고요하게 유지하면 된다는 식의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지지 않았다. <논어>에 나오는 은둔자 하소장인(荷篠丈人)처럼 세상일을 과감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결함의 세상을 응시하고 삶이 슬픔의 그릇임을 깨달았으나,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순수한 삶 속에서 슬픔을 이겨낼 힘을 발견하고는 하였다.

또한 김시습은 상대적인 가치들의 부정을 통해서 본래적 자아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선승이기보다 시승(詩僧)이고자 하였으며, 선(禪)의 직지(直指)를 일정하게 평가하면서도 선종에 몰입하지 않았다. 그는 천당지옥의 설을 ‘허설(虛設)’이라 보았고, “불경에서 인연으로 비유하는 따위의 일은 모두 부처가 진실한 마음에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였다. 그러한 상대적인 사유를 문학으로 형상화한 것이 이 <금오신화>인 것이다.

<금오신화>를 읽는 독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정치 이념을 거기서 읽어낼 수도 있다. 김시습은 다른 많은 시와 문에서 <춘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정치 의리의 수립을 염원하였기 때문이었다. ‘남염부주지’에서도 김시습은 정도(正道)가 존재한다고 믿고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덕망이 있어야 하며, 천명(天命)이 떠나버리고 민심이 이반하면 임금도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을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여 지배질서의 확립에 공헌하였지만, 의(義)와 이(利)를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는 근본 가르침에는 어두운 상태였다. 김시습은 그러한 행태를 비판하고 유교의 이념을 매우 순정하게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고는 매우 급진적이어서, 우활하기까지 하다.

<금오신화>를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볼 수 있다. 이미 조선시대의 어떤 학자는 이 소설에 단종의 손위(遜位)와 수양대군의 찬탈을 바라보는 김시습의 시각이 배어 있다고 보았다. 그 설에 따르면, ‘만복사저포기’에서 여인의 화신이 양생을 끝까지 받들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이생규장전’의 최낭자가 정조를 지킨 것은 김시습이 세종의 은혜에 보답하고 세조 정권에 지조를 팔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 된다. 또 ‘취유부벽정기’에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의 딸은 단종을 가리키고, ‘남염부주지’에서 박서생이 염라왕의 다음 직책을 맡는 것은 찬탈자 세조를 저승에서나마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 된다. 심지어 ‘용궁부연록’에서 한서생은 작가 자신을, 용왕은 세종을, 용녀는 문종과 단종을 가리킨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설명은 이야기의 일부분을 작가의 일생 및 역사적 사실에 곧바로 대입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수긍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한시 문체 최고기법 동원

심경호/고려대 교수·한문학·국문학
심경호/고려대 교수·한문학·국문학
<금오신화>는 주제의식만 깊은 것이 아니다. 문체도 매우 정교하다. 특히 한시를 삽입하여 인간 심리와 사건의 분위기, 대화의 뉘앙스를 드러낸 방법은 아주 절묘하다. ‘남염부주지’는 예외이지만, 다른 네 작품은 모두 갖가지 한시 양식과 부(賦)·사(詞)·초사체를 이용하여 정경과 사건을 묘사·서술·암시하였으며, 극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원귀가 된 여러 여인들이 각기 다른 시풍의 시로 자기 심리를 드러낸 것이나, ‘용궁부연록’에서 어족들이 서로 다른 운문을 이용하여 독창이나 코러스를 부르듯 하는 장면은 수사의 극치이다. 어쩌면 김시습은 현실세계에서의 좌절을 예술세계에서 보상받으려 한 것인지 모른다. 한문 문체의 최고 기법들을 동원한 이 소설을 현대어 번역물로 가볍게 읽고 마는 것은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든다.

서평자 추천 도서

금오신화

심경호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2000)

(번역이 원문에 충실하며, 김시습에 대한 귿들을 골라 함께 실었다)

금오신화에 쓰노라

류수·김주철 옮김

보리 펴냄(2005)

(북한에서 펴낸 <금오신화>와 김시습 시문 번역본. 문체가 쉽다)

김시습평전

심경호 지음

돌베개 펴냄(2003)

(김시습의 삶과 함께 주요 시문을 함께 읽을 수 있다)

50자 서평

◇ 우상복(한국국방품질연구소) “우리 고전이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에 와 닿는 이유를 금오신화를 통해 발견하고 깨달았다.”

◇ 윤상철(바른손 캐릭터사업부 부장) “세상의 그물을 벗어난 여행으로 일관했던 김시습의 삶으로부터 삶의 자유를 만난다.”

◇ 나를 위한 스테이크(인터넷서점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예전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고전이라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가진 나에게도 꽤 재밌었다.”

◇ 김정한(홍익출판사 기획팀장) “김시습의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로부터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 다음주 이후 고전 <파시즘의 대중심리>, <나는 고발한다>, <노자>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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