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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면 모두 인간이다

등록 2023-01-13 05:00수정 2023-01-13 09:39

정신질환과 다른 지적장애의 역사
19세기 이후 시설에 가둔 ‘대감호 시대’

우생학 등에 입각한 편견과 격리…
‘해방’ 이후에도 후유증 가시지 않아

백치라 불린 사람들
사이먼 재럿 지음, 최이현 옮김, 정은희 감수 l 생각이음 l 2만2000원

“인간은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존재다.”

<백치라 불린 사람들>을 쓴 영국 역사가 사이먼 재럿이 제시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인적 정의다. “내가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공감할 줄 알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이중적이거나 유머 감각이 있는 존재” 등 그럴듯한 걸 놔두고 이렇듯 ‘시시껄렁한’ 것을 택했을까. 숱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일 테지만 지은이는 서문에서 설핏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 대목이 눈에 몹시 거슬렸는데, 400여 쪽 책을 덮고 난 뒤에 결국 이 문장은 나를 향해 돌진해 와 가라앉은 기억을 휘저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담 너머 집에 한 청년이 살았다. 말을 할 줄 몰라 “애~” “애~” 외침으로써 의사표시를 해 애 어른 할 것 없이 그를 ‘애배’라 불렀다. 나를 포함해 그 동네에 살지 않는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해 피해 다녔다. 2학년 즈음, 여럿이 그를 ‘머저리’라고 놀리는 틈에 꼈다가 얼굴이 벌게 쫒아온 그한테 책보를 뺏긴 적도 있다. 담임선생이 애꿎은 뒷감당을 했다. 애배가 구구셈 정도는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농사일을 돕고, 나뭇짐을 져 나르는 걸 본 적이 있다. 대학생이 되어 철학개론 수업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공부하면서 여러 고급스런 정의에 ‘애배’는 포함되지 않는 걸 알았다. 듣자니 혼인을 하지 못한 채 총각으로 늙어 죽었는데, 그는 스스로 살 만한 삶을 살았을까. ‘일찍 죽는 편이 낫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지은이의 ‘시시껄렁한’ 정의는 내게 충격이다. 지적장애인을 인간으로 품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지적장애인을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단계별 능력 검증 없이 있는 그대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완전한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의사,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판사 앞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고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백치라 불린 사람들>은 19세기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140년에 걸친 ‘대감호 시대’를 중심으로 전후 400년 동안 벌어진 지적장애인에 대한 담론이다. 지은이가 영국인인지라 영국 얘기가 중심이다. 하지만 대영제국 식민지를 거느린 시절이 포함되고, 프랑스와 미국을 아우르기에 보편사라 할 만하다.

영국 얼스우드 정신의료시설의 초기 드로잉. 1854년 3월11일자 &lt;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gt;. 세계 최초의 백치아동을 위한 특수목적의 정신의료시설로 1855년 500개 병상을 갖춰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생각이음 제공
영국 얼스우드 정신의료시설의 초기 드로잉. 1854년 3월11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세계 최초의 백치아동을 위한 특수목적의 정신의료시설로 1855년 500개 병상을 갖춰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생각이음 제공

지적장애인은 예부터 있었지만 동서양 공히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타고난 탁월한 지능을 활용하여 평생 연구에 매진했을 학자들이 지적장애나 낮은 지능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거나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적장애인을 사회에서 격리하여 별도의 공간에 대규모로 수용해 관리하던 ‘대감호 시대’, 장애인 수만 명을 가스실로 보내 학살한 나치시대를 거치며 비로소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지은이는 18세기 민형사 재판기록, 당대 사람들이 주고받던 농담과 속어, 소설과 시, 풍자만화, 회화, 대중적인 창작물과 여행기를 두루 살펴 백치라 불린 사람들의 위상과 담론을 재구성하는데, 대감호 시대 이전에는 그들이 이상한 사람, 심지어 웃음거리가 되었을지언정 지역사회에 머물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고 말한다. 가족에게는 사랑을, 지역사회에서는 옹호를, 법정에서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며, 직장을 다니거나 이따금 결혼도 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경계시기를 훑음으로써 지적장애인 박해의 단초로 찰스 다윈을 끄집어 올린다. 그는 종의 기원에서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획기적인 논리를 폈다. 이후의 저작과 그것을 계승한 제자들을 거쳐 동물과 인간을 잇고자 하는 진화심리학으로 발전하는데 인간인 백치를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식민시대에 이르러서는 문명인 백인 대 야만인 유색인의 이분법으로 이어져 백인의 유색인 지배를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교도를 개화대상으로 삼아 식민주의 첨병을 자임한 기독교 복음주의도 큰 몫을 한다. 이 대목에서 내게 개화기와 강점기 조선의 처지가 환기된다.

충격적이게도 시민의 시대를 연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도 지적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불렀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뭔고 하니, 무능한 자도 세습하는 군주제에 대항하여 사회계약 당사자로 시민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동료와 더불어 담론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지적장애인은 거기에 낄 여지가 없음을 공론화했다는 것이다. 보수나 진보나 지적장애인에 관한 한 한통속이어서 우생학으로 귀결되고 문명사회를 이루기 위한 ‘사회 공학적 국가정책’, 즉 격리와 인종개량을 추구하는 ‘더러운 시대’를 낳았다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몽테스키외, 윌리엄 워즈워스, 찰스 디킨스 등 잘 알려진 문사들의 저작에서도 지적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두루 발견된다.

1980년대 지적장애인을 지역사회로 되돌려보내는 ‘해방’ 이후는 어떤가. 지은이는 ‘대감호 시대’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다고 본다. ‘짝퉁’ 아이큐(IQ) 평가로 인간 등급을 매긴다든지, 피부색깔로 차별대우한다든지.

지은이는 지적장애인이 별종이 아니라 조금 다를 뿐이라며 정작 달라져야 할 존재는 비지적장애인이라고 말한다. 다 같은 인류로서 ‘쪽팔리지’ 않으려면.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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