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제도의 특산품이었던 육두구의 그림(1619). 위키미디어 코먼스
육두구의 저주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l 에코리브르 l 2만7000원
<대혼란의 시대>를 통해 기후 위기가 ‘문화와 상상력의 위기’라는 독창적 주장을 펼쳤던 인도 출신 작가 아미타브 고시가, 우리 앞에 닥친 기후 위기의 기원을 한 향신료에서 비롯된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적 착취에서 찾는, 역시 독창적인 주장을 담은 또 한 권의 책을 선보였다. 바로 <육두구의 저주>다. 육두구(肉荳蔲), 인도네시아 반다제도에서만 번성한 “하나의 생물 종”이지만, 17세기 초반부터 세계를 ‘들었다 놨다’ 했던 항신료다. 전조는 16세기 중반부터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잉글랜드”의 의사들이 육두구가 “당시 유라시아를 휩쓸던 유행병을 치료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그 가치가 껑충 올랐다. 당시 육두구 한 줌이 “집 한 채, 혹은 선박 한 척을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로 “부러움을 유발하는 사치와 부의 상징”이었다.
문제는 1621년 4월21일 밤 터졌다. 네덜란드 군대가 50여 척의 배와 2000여 명의 병력으로, 일원화된 통치체계 없이도 평화로웠던 반다제도를 피로 물들였다. 네덜란드 군대는 섬 전역의 마을과 정착촌을 불살랐고, 반다인들은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현대의 학자들은 “반다제도 인구에 대한 거의 총체적 절멸”을 획책한 이 사건이 “네덜란드 향신료 무역의 독점을 강화할 목적에서 자행한 제노사이드가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바로 이후 수백 년 동안 지배적인 세계 질서가 된 ‘유럽 식민주의의 전조’라는 사실이다. 네덜란드는 “향신료 독점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고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욕”을 부렸다. 네덜란드인들은 “동인도에서 오는 향신료에 대한 비용을 치르는 데 아편을 사용”하면서, 아편을 상업적 교역에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식민지로 부린 땅의 온갖 자원을 수탈한 것은 물론이고, 인명 살상의 수준도 달라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영국도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네덜란드의 선례를 따라 아편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니콜라 벨랭(1703~1772)이 제작한 인도양 반다제도의 지도. 에코리브르 제공
유럽인들의 식민지 개척은 단지 정복욕에 그치지 않았다. “다른 대륙의 생활 방식에 어울리도록 광대한 지역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수천 년 동안 그 땅에서 살아온 이들의 생활 방식을 훼손하고 말살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저자는 유럽인들의 정복욕이 정교한 “프로젝트”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목적을 “황무지로 인식되던 영토를 유럽인의 생산적 토지 개념에 맞는 영토로 탈바꿈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북미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주지를 옮겼다. 인디언이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땅을 생산성 있게 만듦으로써 그것을 ‘개선했다’는 개념에 기반”하여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육두구를 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에 의한 지구 황폐화의 길은 예견된 셈이었다.
아미타브 고시가 찍은 반다제도 구눙아피 산의 모습. 에코리브르 제공
테라포밍(terraforming), 즉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장소 이름을 바꾸고, 농경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키우고, 이동식 거주에서 영구 거주 형태로 바꾸는 과정을 흔히 ‘문명화’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 과정 전체가 지구의 위기를 앞당겼다고 강조한다. “근대성 이데올로기”가 “유럽의 식민주의 및 정복 프로젝트의 확대”와 손을 잡으면서 지구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견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19세기 들어서는 화석 연료 확보에서 우위를 점한 국가들이 결국, 식민지 쟁탈전에서도 승리했다. “전쟁과 군사력 발휘에서 화석 연료가 중요해지는 새 시대”는 이미 19세기 초반부터 활짝 열렸다. 영국이 중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화석 연료 확보, 이어진 산업의 발달, 결과적으로 나타난 지구의 위기는 곧 기후 위기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상당하다.
이 같은 경향은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조금 다른 방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국 최대 고용주이자 부동산 소유주인 미 국방부”는 오랫동안 “지구상에 있는 그 어떤 기관보다 더” 지구 온난화의 영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어떤 해군기지는 해마다 홍수 피해를 입고, 세계 곳곳의 미군 기지들도 “기후 관련 문제에 고루 시달리고” 있다. 기후 위기 역시,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안보에 속하기 때문에 “기후 관련 재해는 그 자체로 세계 차원에서 진행되는 가파른 군사비 지출 상승에 기여하는 요인”이 된 지 오래다. 이래저래 지구는 위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유럽 식민지 지배”에 대한 침묵과 “‘자연’에 대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육두구에 대한 탐욕에서 시작된 인간 욕망의 끝, 즉 지구의 위기는 거의 대부분 가난한 나라를 향한다. 서구의 엘리트들은 대개, 그간 각종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기후 위기에서도 생존하리라 낙관한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무너진 곳은 오히려 미국 중심부, 유럽 각국이었다. 안전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인도 출신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인간은 그런 세상을 창조할 만한 능력도 여유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 방식은 무엇일까. 저자는 “생기론적 사고”의 회복을 강조한다. 쉽게 말하자면 “공감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공감 능력은 다른 종류의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면서 “결국에 가서는 우리에게 구원으로 가는 길을 밝혀줄 수도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허무맹랑한 기대라고? 책 말미 저자의 말로 글을 마친다. “이것은 마술적 사고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술적인 것으로 치자면 화성을 식민지화한다는 발상, 또는 오늘날 파리 협정에 소중히 모셔져 있는, 대기로부터 방대한 양의 탄소를 제거하는 새로운 기술이 머잖은 미래에 마법처럼 등장하리라는 믿음이 한 수 위일 것이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