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영국의 작가 닉 혼비가 쓴 책 <피버 피치>에서 읽었던 대목들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스널 에프시(FC)의 팬인 작가는 자신의 축구 사랑(정확하게는 아스널 사랑)의 역사를 가감없이 담아냈는데, 개중에는 ‘뭐,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광적인 애착’을 드러내는 대목들이 있거든요. 이를테면 이런 식. 축구 중계를 보다가 여자친구가 기절했는데 꼼짝도 않고 동점골이 터지기를 기도한다거나, 가족들마저 모든 가족 모임 일정을 축구 일정에 맞춘다거나…. 이기고 있는 상황인데도, 바로 전 경기에서 마지막 몇 초를 남기고 동점을 허용한 일 때문에 후반전 라디오 중계를 듣지 않는 등 각종 징크스들은 그저 애교에 가깝습니다. 경기에 너무나 ‘진심’인 나머지, 텔레비전 화면에 잡힌 관중석 속 자신의 얼굴은 언제나 시종일관 굳어 있었단 이야기에는 헛웃음마저 나옵니다.
이토록 광적인 집착 뒤에는 작가의 강박증이 있습니다. 편안하게 즐기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나 아스널(더 정확하게는 아스널 홈구장인 하이버리)에 진지했던 이유에 대해 작가는 말합니다. “내게 꼭 필요했던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이 마구 몰려오는 곳, 가만히 서서 근심에 사로잡힌 채 풀이 죽어 있을 곳이었다.” 이를테면 아스널 사랑은 내면의 우울을 잠시 꺼내어 바람을 쏘이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애정이 무관심과 비애 그리고 아주 지독한 증오로 주기적으로 바뀌는 감정의 사이클을 모두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 이번 월드컵을 대표하는 말로 떠오른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도 어떤 지독한 강박증을 지나온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
닉 혼비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피버 피치>의 한 장면. 주인공이 초조한 표정으로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영화 장면 갈무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