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도 다 가고 해서 그냥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한 토막 한다. 호서 지방에 나무능이란 사람이 살았다. 물려받은 땅이 제법 있어 날마다 소주나 마시고 이렁저렁 지냈다. 아들 넷 모두 혼인을 시켜 손자까지 여럿 본 터였는데, 언제부턴가 집안에 되는 일이 없었다. 농사도 예전 같지 않아 소출이 적게 나고, 집도 낡아 허물어지고 있었다. 특별히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들시들 아픈 사람이 이어졌고, 이런저런 용처에 땅도 야금야금 팔아치워 굶지는 않지만, 집안 살림이 오그라드는 판이었다.고민 끝에 섣달 그믐날 집안 식구를 모두 불렀다. “집안이 왜 이 모양이냐?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 말을 좀 해 보거라.” 모두들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방바닥만 문지르고 있는데, 넷째 아들의 막내아들 아홉 살 막동이가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어른이 없어서 그래유.”
넷째 아들이 깜짝 놀라 야단을 쳤다. “이놈아, 할아버지도 계시고, 큰아버지도 계신데, 어디 어른이 안 계신다는 게냐! 어서 할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말씀 드리거라.”
“그냥 둬라. 할 말 하라고 하고서는 야단이라니, 무슨 소리냐? 그래, 막동이 네가 어른을 하면 잘할 수 있겠느냐?” “시켜만 주면 하지유. 못할 게 뭐 있시유?”
나무능은 한참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럼 내년에는 네가 우리 집안 어른 하거라.” 나무능은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을 찾아 조상님들께 고했다. 자신이 어른 노릇을 못하여 집안이 망하게 되었으니, 새해부터는 막동이에게 ‘어른’의 지위를 넘긴다는 말이었다.
어른이 된 막동이는 집안을 다스리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밥 먹을 때 오지 않으면 굶는다. 나가서 집으로 돌아올 때 빈손으로 오면 굶는다. 이상 두 원칙은 예외가 없다!”
사람 버릇이 어디 쉽게 바뀌던가. 새해 첫날부터 굶는 사람이 속출했다. 늘 하던 대로 간밤에 소주를 마시고 취한 나무능은 해장국은커녕 점심까지 굶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늦잠을 자고 아침을 굶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빈손으로 대문을 들어섰다가 저녁까지 굶는 날도 있었다. 필사적으로 식사시간을 지켜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밥 달라고 들이닥치는 사내들 때문에 부엌을 떠날 수 없었던 부녀자들은 길쌈에 시간을 더 들일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난 사내들 역시 농사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능도 아침을 굶지 않으려면 소주를 끊어야만 하였다.
외출해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오는 물건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지푸라기나 돌멩이를 주워오던 것이, 이왕 주워올 바에야 하면서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주워오기 시작했다. 망태에 담아온 개똥은 이쪽에 반듯한 돌은 저쪽에 모았다. 그것으로 거름을 하고 담을 쌓았다. 집안이 일신(一新)했고 생기가 넘쳤다. 추수를 해 보니 지난해에 비해 갑절이나 되었다. 섣달 그믐날 1년을 채운 막동이가 어른을 그만두려 하자, 집안 식구들이 한사코 말렸다. 막동이는 3년을 채우고 어른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옛날 부산에서 활동하시던 향파(向破) 이주홍 선생의 책에서 본 이야기다. 세상에는 아홉 살 아이보다 못한 어른이 많다는 뜻인가. 독자 여러분들, 세상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연말연시만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강명관/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