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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시대와 역사 앞에 민족적 사명을 다하고자

등록 2022-12-02 05:00수정 2022-12-02 10:47

미수 맞은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회고록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당당한 토로
‘선공후사’ 삶에 대한 자부와 회한도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정수일 회고록
정수일 지음 l 아르테 l 4만2000원

정수일은 12년간 총 457일을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알래스카, 오세아니아 등을 종단 및 횡단하는 답사를 벌이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아 문명교류학을 연구해온 학자다. 2013년 1월 이집트 카이로의 나일강 유역에 자리한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앞에 선 정수일의 모습. 아르테 제공
정수일은 12년간 총 457일을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알래스카, 오세아니아 등을 종단 및 횡단하는 답사를 벌이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아 문명교류학을 연구해온 학자다. 2013년 1월 이집트 카이로의 나일강 유역에 자리한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앞에 선 정수일의 모습. 아르테 제공

1963년 4월 모로코 주재 중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스물아홉살 청년 정수일은 이후 그의 인생행로를 좌우할 한 가지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지닌 ‘환국’이 그것으로, 그가 돌아가기로 한 조국은 북한이었다. 중국 옌볜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국비유학생 제1호로 선발되어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중국 외교부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놓여 있는 셈이었다. 인재를 잃지 않으려는 외교부장이 극구 반대하자 정수일은 아랍어 통역으로 인연을 맺었던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굳은 의지를 밝혔고, 결국 저우언라이의 승인을 얻어냈다.

올해로 미수를 맞아 낸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에서 정수일은 이 일을 자신의 지난 삶에서 있었던 두 가지 변곡점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다른 하나는 북한에서 통일 사업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1984년 남한으로 ‘진출’한 일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보장된 밝은 미래를 뿌리치고, 결국 사형 구형과 옥살이로 이어진 형극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역 중국에서 살아가는 30년간 나는 한시도 내가 당당한 단군의 후예인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점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며, 종당에는 조국에 돌아가 헌신하고야 말겠다는 심지를 줄곧 굳혀왔다. (…) 굳이 내가 그렇게(=환국) 한 것은 지성인으로서 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책 제목에 쓰인 ‘시대인’이라는 표현이 이 결정과 무관하지 않거니와, 그가 말하는 시대인이란 “시대의 소명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실천을 위해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유민의 후손으로 이역 땅에서 태어난 정수일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들어가 일제 말기의 극악한 식민 교육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신생 사회주의 중국의 전도유망한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분단 조국의 통일에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북한에 들어갔고, 평양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국적과 신분을 위장해 한국에 들어와 단국대 교수로 있으면서 간첩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5년간 복역했다. 2000년에 풀려난 뒤에는 실크로드학을 정립하고 문명교류학을 개척하는 등 학자로서 후반생을 살면서 번역과 저술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이 책에는 시대의 소명에 자신을 맡기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온 삶의 자세가 가감 없이 담겼다.

2012년 7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발파라이소 고택 정원에 설치된 구리의자 위 시인의 좌상과 함께한 정수일의 모습. 아르테 제공
2012년 7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발파라이소 고택 정원에 설치된 구리의자 위 시인의 좌상과 함께한 정수일의 모습. 아르테 제공

정수일이 옥중(1996~2000년)에서 집필한 각종 원고들. 아르테 제공
정수일이 옥중(1996~2000년)에서 집필한 각종 원고들. 아르테 제공

정수일 자신이 꼽은 그의 삶의 두 변곡점이 모두 민족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단국대 박사논문을 책으로 엮은 <신라·서역교류사>에서부터 옥중에서 집필해 석방 뒤에 출간한 <실크로드학>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역주를 비롯해 <실크로드 사전> <고대문명교류사>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역주 같은 책들이 전공 분야의 주요 저서들이지만, 그가 낸 책 중에는 민족주의와 통일 담론을 다룬 <민족론과 통일담론>(2020)도 들어 있다. 실크로드학과 문명교류학이 문명과 문명 사이의 교류에 주목하는 학문인 것에 비해 민족과 통일이란 좁고 폐쇄적인 가치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정수일의 생각은 다르다.

“흔히 서구적 개념을 좇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를 대치시키면서 민족주의는 ‘보수’로, 국제주의는 ‘진보’로 흑백논리화하는데, 이 역시 시정해야 할 착각이다. 나의 체험으로서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이고, 참된 국제주의자는 참된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이다.”

카이로 유학 시절 ‘세계’에 눈을 뜨고 세계 일주의 꿈을 꾸기 시작한 그는 모로코 주재 중국 대사관에 근무하며 알제리 독립전쟁에 간여하던 무렵과 남한 진출 준비기에 그 꿈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다. 간첩 활동과 투옥으로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세계 일주의 꿈이 되살아난 것은 2005년 <한겨레>가 조직한 40여일간의 아시아 횡단 실크로드 답사에서였다. 그로부터 12년간 총 457일을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알래스카, 오세아니아 등을 종단 및 횡단하는 답사가 이어졌다. 그 결과는 <실크로드 문명기행>을 비롯한 답사기들로 결실을 보았거니와,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속표지에는 그의 세계 일주 노정을 시기별·지역별로 정리해놓은 지도가 들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009년 1월,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 해돋이를 맞이하고 있는 정수일의 모습. 아르테 제공
2009년 1월,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 해돋이를 맞이하고 있는 정수일의 모습. 아르테 제공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를 한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오는 동안 개인 정수일에게는 숱한 회한과 아쉬움이 남았다. 4대 독자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가 “조모로부터 부모님, 형제들, 조강지처, 딸들에 이르기까지 가족 열두 명 모두의 경조사를 이러저러한 일로 떠돌아다니다 단 한 번도 함께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회한이다. 특히 최승희의 제자로서 중국 중앙가무단 핵심 단원으로 활동했던 조강지처 박광숙에 대해 그는 애통하고 미안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1961년에 결혼해 딸 셋을 낳았지만, 정수일이 1974년 대남 공작원으로 소환되면서 영영 헤어지게 된다. 홀로 딸 셋을 키운 아내가 2015년께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사망 경위도 정확한 기일과 무덤 위치조차 모른다는 정수일은 “이 부족하고 매정한 남편을 저 황천에서라도 한번 맘 놓고 크게 질타해주오!”라며 글로써 통곡한다. 그가 남쪽으로 내려와 결혼한 부인에게도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마찬가지여서 “만시지탄의 자성과 자괴를 금할 수가 없다”고 그는 쓴다.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삶인지라 600쪽짜리 두툼한 책으로도 그 전모를 담기에는 부족했을 듯싶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의 ‘남한 진출 준비기’는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간 셈이어서 아쉽고 궁금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내내 머리에 남는 한 문장이 있다.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도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없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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