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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폭력의 기억은 무엇이 될까

등록 2022-11-18 05:00수정 2022-11-18 10:15

네 딸을 데리고 있어
정욱 지음 l 마카롱(2022)

유년 시절에 겪은 폭력은 무엇이 될까. 상흔이 될 것이다. 다시 덧나기도 하고 아물기도 하는 상흔이. 잊힌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날카로운 통증으로 부활해 섬찟하게 만드는 상흔이. 때로 이 상흔은 세상을 보는 안경이 된다. 시야에 폭력이라는 렌즈가 끼어들어 두려움, 불신, 열등감으로 세상을 대하게 만든다. 때로 상흔은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폭력의 기억이 공감의 불씨로 잠복해 있다가, 특정 대상을 만나 이글거리게 되는 경우다. 과거에 폭력을 겪었던 이가 현재진행형으로 폭력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황을 빛의 속도로 꿰뚫어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런 공감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이 아닌, 본능이 내미는 손길이다.

정욱의 <네 딸을 데리고 있어>는 어린 시절 또래 친구의 폭력으로 신체 기능의 일부를 잃게 된 여성 ‘민영’이 우연히 가해자의 존재를 인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민영에게 일을 의뢰한 쇼핑몰의 사장이, 알고 보니 민영의 일생을 바꿔놓을 정도로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던 가해자였다. 민영은 자석에 이끌리듯 가해자에게 다가간다. 의식할 새도 없이 발생한 일이다. 민영은 가해자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새 상대에게 접근하고, 조금씩 사생활을 알아간다. 그 과정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 중인 민영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압박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숨 막히는 복수전을 예상할 것이다. 그 예상에 맞게, 민영은 가해자에게 큰 타격이 될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이끌리듯 ‘복수’에 돌입해 들어가는 도중에 민영은 예상치 못한 반전과 마주치게 되고, 그 반전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마음에 이는 뜻밖의 변화를 고리로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주제를 극적으로 접합한다. 죽는 날까지 떠나지 않을 천형으로 보이는 폭력의 기억이, 때로 현실에서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 아이러니를 건조한 문장으로 투박하게 표현해낸다. 그리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이러한 기술방식이, 깊고 복잡한 마음의 엉킴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인간’이라 불리는 우리네 생물종의 마음에 너무나 많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알 수 없는 나의 마음,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너’의 마음의 일부라도 그려내기에는 가장 단순한 언어를 동원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폭력을 겪은 이는 폭력의 힘에 압도되어 무력해지거나, 그 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차원을 넘어서려 노력하게 된다. 주인공에게는 후자를 택할 의도가 없었다. 극복할 수 없는 기억과 진행 중인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어느 날 ‘우연’에 의해 가해자의 일상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다. 주인공의 마음에 변화가 인 것도 역시 ‘우연’ 때문이다. 인간은 우연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우연은 언제나 뜻밖의 인자를 품고 있다. 알 수 없는 우연들이 때로 한 인간이 가는 길을 극적으로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설적 장치는 우리네 인생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맺힌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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