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사의 사랑
이순원 지음 l 시공사 l 1만4800원
소설가 이순원은 ‘메밀꽃 필 무렵’ 강원 산허리에 걸린 달빛처럼 ‘은근의 서정성’으로 짙은 족적의 작품 세계를 구가해왔다. 모름지기 1회 이효석문학상(2000년) 수상자인 것이다. 1985년 등단 후 작품에서의 실험과 현실에서의 행동으로 ‘서정의 윤리’는 느루 변주·확장해 오는데 그럼에도 이색적일 장편이 하나 있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졸부들의 해방구 압구정동과 성·자본의 부패한 욕망을 응징하는 이들 얘기로 1992년 큰 화제가 됐다.
이순원의 신작은 옹근 30년 전의 <압구정동엔…>에서 발원한다. ‘작가의 말’이 그러하다. “(당시의) 화제 속 어디에도 이 소설을 추리소설로 분류하는 말은 없었다… 추리소설을 추리소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때부터 혼자 마음속으로 ‘다시 멋진 추리소설 한 편을 써내자’고 생각했다.” “추리기법의 소설”로 회자했던 <압구정동엔…>에 의한 <박제사의 사랑>의 변.
박제사이자 장례지도사인 박인수의 42살 아내 채수인이 목숨을 끊는다. 유서는 미안하달 뿐. 아이들도, 처제 수정도 이유를 알지 않느냐 인수를 몰아붙인다. 모르거니와 몇 단서조차 인수는 말할 수 없다. 장례 후 넋을 잃고 지내다 산양의 가죽을 벗겨나가는 꿈을 꾸고, 딸아이의 재촉에 또 꿈인 양 한마디 뱉는다는 게 “엄…마는…그래…서는…안…될…일이…있…었어….”
인수가 아는 것과 알아내야 하는 것은 거듭할수록 인수 자신을 무너뜨리는 ‘앎’이다. 하필, 아내가 몰래 한 임신 테스터기의 두 줄을, 이미 오래전 정관수술한 인수가, 자살 이틀 전 본다. 말하자면 두려운 진실.
떠난 이에 대한 분노와 연민이 교차할 즈음, 아내에게선 한 오라기 볼 수 없던 당당한 기세의 승마장 대표 정은영이 아끼는 경주마의 박제를 의뢰해온다. 말 박제는 희소할뿐더러, 은영의 죽은 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만으로 인수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말을 떠올리고, 혼신의 힘으로 그 시절 그 생명을 복원해 간다.
사인의 추적은 피할 도리가 없다. 연민은 반려자에 대한 진심의 애도로 걸러지고, 인수는 아내의 휴대폰에 그나마 남겨진 이들을 하나씩 쫓고, 급기야 수인의 고향 은사에게까지 닿는다. 여강이 흐르는 여주는 부모 없이 동생들을 건사하던 10대 가장 수인이 가장 가난했던 그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꽃 같고 아름다웠다” 추억한 데가 아니던가.
“등가죽 부족한 걸 뱃가죽 당겨” 박제할 수 없듯 이 사실로 저 사실을 두둔할 수도, 기만할 수도 없다. 박제사의 추적은 가장 당당했던 아내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복원하는 일. 그 상태를 영원히 바라보겠다는 불멸의 애도가 된다.
추리기법의 소설이 아닌, 서정기법의 추리소설 한편 얘기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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