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l 문학동네 l 1만5500원
이 놀라운 소설집은 완독에 적잖은 시간을 요구했다. 한 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의 밀착성(낯설게 밀쳐내며 웃기고 감아댄다)이 첫번째요, 한 줄이라도 놓쳤을 때 갇혀버릴지도 모를 맥락의 밀실성이 두번째 이유다. 읽었던 단락, 읽었던 다른 단편으로 돌아가 또 읽는다.
밀착성과 밀실성은 바로 지금 우리 삶의 형질을 신랄 발랄하게 은유해낸 결과다. 자주, 작가는 (인물을) 눌러 담아 (배경을) 빗대고 (사건을) 숨긴다. 문장은 적확하나 문단은 모호해진다. 결국 독자는 추리하게 된다. 어찌 받아‘들일’ 텐가, 어떻게 읽어‘나갈’ 텐가. 독자로선 주관과 삶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 지점에서 각 단편의 함의도 더 분방하고 불온하고 순수하게 드러나겠다. 이 소설들을 실험적 메타소설, 이르자니 윤리적 후일담? 뭐라든 무용하다.
분류미상.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불러내고 담고 싶은 마음”(10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을 새긴 필명의 신예 이미상의 첫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이다.
소설가 이미상. 1982년생으로 2018년 데뷔했다. 그는 10일 <한겨레>에 “(작품 간) 동명의 인물들은 완전 동일인도, 완전 다른 이도 아니다”며 “정반대로 (작품들의 의미를) 읽어도 좋다, 그건 독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송인혁. 문학동네 제공
데뷔작으로 2019년 젊은작가상을 받은 ‘하긴’의 첫 단락부터 ‘이름’과 ‘이름’ 사이 은유들이 나앉았다. “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이름이 거하면 인생이 이름에 잡아먹힌다. 그런데도 아내는 순우리말 이름을 고집했다. 1988년 자주민보 대신 ‘한겨레신문’이라는 제호를 지지했던 것처럼. 첫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웬만한 인생 살아서는 이름값 하기 힘든 이름이었다.”
이 첫 문단은 소설집 전체 맥락에서 유혹 같은 냉소이고 복선인 듯 함정이다. 부부는 대학 운동권 586 커플. 보미나래는 위 세대의 위선, 위악과 위약을 캐는 것으로 운명지어진 듯 부모의 기대를 가열차게 저버리며 자란다. 자유방임의 “급진적 양육관”을 지녔던 ‘나’와 친구들, “내가 잠시 바람을 피웠던 것도 결국에는 존재의 근거가 채워지지 않아서였”다고 “고작 젖과 좆과 질의 문제가 아닌 것”이라 서사하는 이들의 결연한 ‘대의명분’. 그러다 맞닥뜨린 딸의 불행 앞에서 남자는 기억해낸다. 오래전 아내가 인정해준 ‘나의 명분’, 즉 “하긴 하는 남자”였다는 사실. 당위와 무책임 사이 “약간 힘을 뺀 채 나른하게 완수하긴 하는 남자”.
거창한 이름 대신 거창한 명분에 잡아먹힌 아이의 삶 앞에서 친구들끼리 딸들의 자격을 견주고 꾸며대며 자위하던 ‘나’는 칼럼으로 여기저기 ‘사랑’을 논(고)하며 화해해 간다.
(워워, 잠깐. 화해? 그게 화해인가. 586 엄마는 ‘하긴 하는 여자’였나. 엠제트(MZ) 딸들은 여기서도 도구인가, 왜 변변한 대사 하나 없는가) 두번째 단편 ‘그친구’를 보자.
주인공은 엔지오 간사 ‘규’다. “누구를, 어떻게 조질”까 자문한다. 대학 때 함께 야학을 했던 남편 ‘김’(기자다)과 섹스도 해본 지는 오래인데 남편이 규와 다니던 영화 모임서 만난 구지경과 섹스한 휴대전화 동영상을 본 것이다.
모임 중독자 지경의 별명은 ‘추방’이다. 모임마다 어떤 사달인지 쫓겨나 전국서 한 모임 하는 자라면 누구든 “지경과의 추억이 있”댄다. 편린의 뒷말들로 짜깁기된 지경은 그저 “나도 걔 좀 알지” 하는 지경에 놓인다.
규는 늘 육아로 분주했고 교묘하게 불균등한 부부 관계 아래 싸움조차 교묘히 패한다. 술 취해 ‘토정’하는 남편까지 상상하게 한다. “그친구, 예전엔 정말 멋졌죠… 그러나 역시 애엄마가 돼 그럴까요?…”
규는 예의를 잊고 삽시간 거리를 좁혀 “멀리서 정중히 목인사를 하던 사람도 남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게 되는” 세태를 혐오한다. 본인의 격이자 윤리다. 지경을 불러 뱉은 첫 반말 “왜 그랬니?”는 전 생애를 팔아치운 질문인 셈. 규는 정사의 이유, 지경의 과거 추방사까지 추궁하며 희열을 느끼고 그런 자신이 밉다가 대화 말미에 묻고 만다. “(둘이 만날 때) 남편이 날 뭐라 부르디?” 한참 꿰고 끌고 왔더니 제 콧구멍이던가. 규는 영화 모임에 나오지 않겠다-즉 또 추방되겠다-는 지경에게 웃으며 말한다. “나와요, 나와, 나도 나오고, 지경씨도 나오고.” 진심이다. ‘그럼 남편이 못 나오겠지.’
(워워, 잠깐. 그니까, 그게 화해가 되나. “(말을 장악해) 추문 끝에 살아남는 건 남자들”인 판국에 여자끼리 다투다 여자끼리만 연대하는 밀담으로? ‘남편’은 추방된 건가, 추방한 건가) 그러니 세번째 단편을 보자.
‘이중 작가 초롱’의 초롱은 불법촬영 피해자 문제를 파고든 소설로 주목받는다. 반면 반년 전 습작은 불법촬영된 여고생 수진과 촬영한 중년여성 명자가 갈등 뒤 화해하는 블랙코미디. 누군가 습작을 악의로 공개한 뒤 “가볍게” 피해자를 재현하던 작가가 그새 “그토록 절절히” 재현하는 게 가능하냐는 이유로 초롱은 문단서 매장된다. 이때 뒤따르는 반전은 대단히 도드라지는데, ‘초롱’이란 필명으로 투고하고 작품성도 인정받는 성명불상 다중의 형성이다. 초롱의 서사가 계속된다는 본원적 상징, 발화의 진정성에 대한 식별이 붕괴됐다는 부가적 상징.
초롱은 마침내 옛 글쓰기 선생 앞에서 반말로 따진다. “너야?… 요즘 소설들 다 거지같아서? 그 거지같은 것들 빠느라 네 글 몰라줘서?… 나 엿 먹이려고 내 글 유포한 거야?” 종국엔 생각도 고쳐먹는다. “수진과 명자는 화해해서는 안 되었다…”
관계가 분절되고 가치는 중층화되는 시대, 폭력은 확산 전 틈입한다. 어제의 화해 공식이 오늘의 화해식이기 어렵다. 은유와 은유는 겹쳐 더 깊이 사유된다. 초롱은 ‘하긴’의 주인공 ‘나’가 부러워한 운동권 친구 ‘문’의 딸과 이름이 같다. ‘나’의 못난 딸 보미나래는 ‘그친구’ ‘규’의 딸과 동명이다. 지경과 섹스 동영상까지 찍은 ‘규’의 남편은 “존재의 근거” 너불대며 바람피웠다 말하는 ‘하긴’의 ‘나’와 겹친다. ‘나’의 친구 ‘문’은 작가 초롱을 매장하는 데 앞장선 글쓰기 선생에게 재현의 상처를 입은 운동권 친구와 닮았다. 명자와 화해한 수진은? 숨은 폭력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분열적으로 애쓰는 이(‘여자가 지하철 할 때’), 침범하는 자에 맞서 티 나지 않게 존재를 확보(‘티나지 않는 밤’)하는 여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인물의 상호텍스트성이 이러할진대, 사건·배경은 책장 홈을 아무리 깊게 파도 데칼코마니처럼 소설들을 건너 낌새로든 실체로든 이어지기 마련. 이 사회가 경험해 온/갈 사건들을 낌새로든 실체로든 저마다에게 반추시켜, 존재 못 한 삶들이 서사 지배적 부류·세대의 위선에 맞서 비로소 ‘발언’하지만 가일층 다단한 윤리와 격을 요구받는 시대에서 거듭 미상의 누군가 침묵-추방되는 구조는 명료해진다.
세월호와 미투 이후 변화한 구조를 감당해낼 개별의 지속가능한 관계란 없는가. 수진과 그에게 “서사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누구 죽이지 말고 되도 않는 반전 꾸미지 말고 움직이고 또 움직일 것” “언제나 생략이 노출보다 나은 법” 따위 경구를 전하는 남자의 관계가 한 소끔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수진의 아포리즘이 저 수진에게도 중할까. 진짜 마지막 문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열어 버린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 때문에 소설집을 처음부터 다시 훑어야 했다. 독후감이 같을 필요는 없다. 같은 시대를 되짚어 읽어 나아가려 할 뿐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