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숙 지음 l 글항아리 l 1만5000원 가난은 정의되지 않는다. 묘사될 뿐이다. 가난은 경제적 자유와 자존감이 없는 상태, 그것이 왜 없는지를 묻는다면 다시 가난해서라고밖에. 진짜 가난은 규명되지 않으니 가난한 자들조차 그나마 복지망에서 배척되지 않으려 “때로 빈곤을 과장하거나 가장”한다. 이르자니 르포소설인 <황 노인 실종사건>은 두 인물이 축이다. 가난이 주제인 자 황문자, 가난이 소재인 자 김미경. “학교라구는 댕겨본 적이 없”는, 상경해 결혼할 적 출생 신고조차 안 된 사실을 알았던 연탄 배달부 86살 황 노인과 담당 생활관리사 62살 미경이 만난 지는 1년 반. 꽤 친해졌고 둘의 생애사 인터뷰도 마무리되어간다. 황 노인은 넉살 좋은데다 무엇보다 1년 전, 10년 전이 더 고단하였기에 모두 떠난 “지금이 젤로 좋은 시절”이라 말하는 다수의 고령 독거여성 중 하나. 중상층 출신 미경은 30대 초반부터 가난의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의 근원을 여전히 추궁하는 돌봄노동자이자 구술생애사 작가. 듣기만 해도 변함없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혼신이 집중되며 숙연해진다”는 청년 시절의 ‘도벽’ 탓인지 결결이 “남의 가난을 도둑질해 그것을 재료로 글을 쓰고 강의하며 자기 삶을 운영하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해야 하는 가난의 주변인. 그러다 한 새벽 황 노인의 문자를 받는다. “끝내두한댈거업서요인저미안해오” 심란하면서 호기심에 더 많이 설레는 미경. 이는 말미 이르러 가난의 본질을 조지 오웰식으로 직시할 수 있게 하는(“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건 “능력”이라 했다, <나는 왜 쓰는가>) 복선으로서의 양가적 감정임이 드러난다. 더불어 그 처연한 진술들이 <할배의 탄생> 등 논픽션을 쓴 최현숙의 첫 소설에 박힌 문장이란 걸 상기함으로 가난은 어떤 각오와 헌신 없이 묘사조차 어렵단 것을 겨우 조금 짐작하게 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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