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여름
알베르 카뮈 지음, 박해현 옮김 l 휴머니스트 l 1만2000원·1만3000원
알베르 카뮈(1913~1960). 이름이 장르이고 계보일 법한 작가가 태어난 지 내년으로 110해. 도처는 문학적 제례로 그를 소환하겠으나, 카뮈는 이미 <페스트>로 70년 이상을 거슬러 팬데믹 내내 현재형인 양 읽혔다. 이번 출간된 <결혼>과 <여름>은 각각 30년대, 50년대 논픽션 산문집으로, 프랑스 식민변방(알제리)의 카뮈를 세계에 각인시킨 첫 소설 <이방인>(1942)과 <페스트>(1947)의 전과 후를 잇는, 그러니까 마치 이들의 전조이자 예후처럼 읽힌다는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주로 도시를 무대 삼아 허무와 권태에 대결하는 20대로부터의 기질과 지향이, 시적으로 때로 습작하듯 본능적으로, 작열되기에 평자들은 가장 서정성 높은 카뮈의 작품으로 둘을 꼽는다.
카뮈에게 지리 공간은 각별하다. 사상과 시심의 원천이며 회로다. 도시는 건설과 폐허의 문명이자, 빛과 돌, 바다를 직관시키는 원시다. 그 도시에선 ‘젊음’의 관능이 충만하여 절망과 대척한다. 부조리를 감당한다. “사랑받지 못함은 불운에 그치지만, 결코 사랑하지 못함은 불행”이라는 정언명령의 사도라 할 것인데, “우리 모두 오늘날 그 불행 때문에 죽어가고 있”(‘티파사에 돌아오다’)으므로, 젊음은 그의 철학서 제목처럼 죽음과 전체주의에 <반항하는 인간>의 생명성이라 할 만하다.
작품 내내 도시 기행이 청춘을 (되)새기는 의식이 되는 까닭이다. 그가 정신적 고향으로 여긴 알제(<이방인>의 공간적 배경)가, <페스트>의 무대로 세운 오랑이, “시간만 나면” 찾아갔다는 티파사가 그러하다. 감각은 선명하여 “‘나는 본다’란 말은 ‘나는 믿는다’와 같”아지고(‘티파사에서의 결혼’), 생명의 향취로 “아무도 존재의 문제를 놓고 토론하지 않고, 아무도 완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미노타우로스 또는 오랑에서 멈춘 발걸음’), 마침내 “일생은 쌓아가는 게 아니라 불태우는 것”(‘알제의 여름’)이 되는 곳.
“신들이 강림해 수런거린다”는 20대 시절의 티파사는 “이제 더는 젊지 않다는 사실”을 현시하는 도시로 39살 재회한다. “어떤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으려고 애”써 찾은 1952년. 하여 “다시 얻은 깨달음”은 녹슬지 않는 칼날 같다. “나는 결국 절망하지 않았다.”
그가 대척했고 끝내 제척해낸 절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산문집의 알짬을 밴 지점이리라.
“절망은 말하지 않는다… 절망의 문학이란 용어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낙관주의는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동시대 사람들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의 북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그 이후 우리 역사는 살인, 불의와 폭력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흔히 마주치게 되는 진짜 비관주의는 그 숱한 잔혹과 치욕보다 더 끔찍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모욕에 맞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고, 잔혹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인류에게 수천 년 동안 고통 속에서도 삶을 예찬하도록 가르친 그 빛에 본능적으로 충실했기 때문이다….”
<페스트> 이후 거듭 벼려낸 작가 선언 같다. “…죽기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온갖 말을 동원해 그 빛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수수께끼’) 1950년. 사고로 숨을 거두기 10년 전이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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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1957년. 44살, 역대 최연소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 휴머니스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