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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영화보다 극장,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는

등록 2022-10-28 05:00수정 2022-10-28 10:57

‘영화관 소설집’ 표방한 기획 단편집
일곱 작가가 펼친 ‘가장 현실적인 꿈’

조연들의 무대에 지핀 36.5도의 희망
“극장은 뭐든 일어나는 마법의 공간”

캐스팅

조예은·윤성희·김현·박서련·정은·조해진·한정현 지음 l 돌베개 l 1만3000원

왼쪽부터 조예은·윤성희·김현·박서련·정은·조해진·한정현 작가. 사진 돌베개·채널예스 제공
왼쪽부터 조예은·윤성희·김현·박서련·정은·조해진·한정현 작가. 사진 돌베개·채널예스 제공

스스로 이르길 “존재감이 0”이고 “나 같은 거 사라져도 이 학교에서는 아무도 모를” 고교생 지호. 이 계절의 공기보다 가벼운 그의 존재감엔 딱히 ‘사연’이랄 게 없다. 대개의 조연들처럼. 사연은 주인공의 서사이고 반전에나 맞는 외투이니까.

‘나’의 존재감이 한때나마 바뀐 적은 있었다. 출근길 나선 뒤로 세상 무대에서 완벽히 존재를 감춰버린 아버지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다. 엄마는 실종 신고 뒤에도 흔들림 없는 평정 상태를 유지해서 경찰과 주변의 의심을 샀다. 두 달 뒤 나는 학교로 돌아갔으나 “마치 ‘아빠가 사라진 아이’라는 글자가 내 머리 위에 항상 떠다니는 듯” 선생님조차 혼내길 마다하며 삼가 다루는 학생이 된다. 중학교 진학 뒤에야 다시, 당연하게 존재감 없는 아이로 원위치한다.

나는 대학에 뜻이 없으므로 왕왕 오전 수업을 빠진 채 조조영화 보는 걸 낙으로 삼는 중인데, 어느 날 극장 안의 한 인물이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어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실종, 즉 느닷없는 부재가 큰 상처인 나는 책을 많이 읽는 민희에게 겨우 본 대로 고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조금 아름답고 튼실하다.) “…화면에 극장 관객석 장면이 나왔거든. 그 사람 옷도 기억해. 우리 학교 교복 입고 있었어….” “응.”

“졸고 있지도 않았거든? 내가 스크린도 확인해 봤어. 딱딱한 벽이더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응.”

(중략) “내가 믿어서 현실인 게 아니라 진짜로 봤고, 진짜 현실이었다니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호야, 네 말을 믿어.”

“거짓말, 난 내 말을 믿는다는 네 말을 못 믿겠어.” (중략) “우리 엄마가 해 준 얘기가 있는데, 너한테만 말해 줄게.” “비밀이야?” “비밀은 아니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믿거든. 이 이야기를 해 주면 내가 네 말을 믿는다는 걸 네가 믿어 줄 것 같아서.”

민희는 일터인 대형서점에서 책을 읽다 사라진 사람들을 본다는 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롱이나 살까 두렵던, 미천한 지호의 납득 못 한 목격담을 지호의 주변에선 의심 없이, 두둔한다, 깜냥껏. 지호만 몰랐을 뿐, 민희처럼 다들 지호를 보아오거나 지호의 뒤통수까지 기억하는 이들이다.

극장 청소부. “학생, 극장 안에서 사라지는 건 참 많아(…) 휴대폰, 지갑, 귀걸이, 선글라스… 사람도 종종 사라지고. 대개 애인을 많이 잃어버리지. 내가 장담하는데, 100프로 화나서 먼저 가 버린 거야. 학생도 잘 생각해봐. 그 친구한테 무엇을 잘못했는지(…)”

극장 영사기사는 “상영 중에 나가는 관객은 워낙 많”다며 “영화 상영이 끝나면 모두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간다”고 말한다. 그가 아는 어떤 영사기사가 ‘사랑해’라는 손글씨를 찍은 필름 컷을 상영작 필름 사이에 몰래 붙여 틀고, 그 영화를 본 여자는 나중 그 남자 기사의 손편지를 받자 “‘사랑해’라는 이 글씨를 전생부터 보아 온 것 같다”며 프러포즈를 승낙한, 제 부모의 얘기를 증거로 들려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에요. 우리의 몸은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보고 있어요(…) 세상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제법 일어나요.”(소설의 억지 같다면, 2007년 칸영화제 60돌을 맞아 35명 거장 감독들이 ‘극장’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의 한 단편(‘아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를 떠올려 볼까. 눈물을 흘리는 한 여성 관객, 영화가 끝난 뒤 주변에 묻는다. 흑백영화였냐고, 앞을 보진 못하니까.)

옴니버스 영화 &lt;그들 각자의 영화관&gt;(2007)에 담긴 3분짜리 단편 ‘아나’(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한 장면. 영화 상영 중 우는 여성은 극장을 나오며 주변에 묻는다. 흑백영화였냐고.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7)에 담긴 3분짜리 단편 ‘아나’(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한 장면. 영화 상영 중 우는 여성은 극장을 나오며 주변에 묻는다. 흑백영화였냐고.

실제 그날 극장 내 인물은 스크린으로 넘어갔고, 실제 지호의 아버지도 제 발로 사라졌으며, 실제 지호의 엄마는 그럼에도 평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연유를 확인해 가는 지호에게 실은 존재감이 없던 세계, 그 세계에서의 자신의 존재도 비로소 한층 선명해진다.

단편 ‘사라진 사람’(정은)은 상실과 이별에 대한 더없이 청초한 미스터리라 해야겠다. 사라짐을 감지해 주는 자, 부재를 기억해 주는 자들에게 진실의 열쇠를 맡긴 덕분이다. 그 마법이 일상화되는 곳이 극장인 셈이다.

물론, 모든 극장이 다정하진 않다. 차별·혐오의 폭력적 세태와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사건을 배경 삼은 김현의 단편이 그러하다. 누군가의 상처를 극대화하고 영원 재생하여 마침내 가두는 공간이 때로의 극장이다. 절망으로 자살하려는 인공지능(AI) 인간 ‘산호’를 지상에 붙드는 건 ‘민’이라는 인간이다. 종족의 문법(출신·이성애 등)을 뛰어넘어 둘은 교감한다. “너를 믿어, 그래야 나를 믿지.” 아무렴 제목이 ‘믿을 수 있나요’인 까닭인데, 믿음과 기억으로 사라짐을 막는다는 점에서, 믿음과 기억으로 사라짐을 견뎌내는 ‘사라진 사람’과 의도 없이 맞닿아 있다.

이들 단편이 실린 소설집 <캐스팅>은 “내가 해내지 못한 일에 대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변명하는 습관이 생”기거나(‘여름잠’, 한정현), 찰나를 지나 “스스로가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거나(‘캐스팅’, 조예은), 제 삶에 “없는 모든 것”이 오직 영화에나 있던 이(‘소다현의 극장에서’, 조해진) 등을 주인공 삼은 일곱 작가 단편들의 모음이다. 대저 상실에 익숙(해져야)할 자들이다.

이른바 ‘영화관 소설집’이란 출판 기획대로, 그들 주변엔 극장이 있는데 조연들이 뻔(뻔)하게 ‘영화’처럼 주연이 되지 않는다. “그냥 삶에 큰 위기 없이 대사 한두 마디 던지고 퇴장하는 조연, 엑스트라가 좋”(‘캐스팅’)다는 좀비소년, “사람으로 사람을 보살피며 사람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는 마음으로 12살 여자아이를 입양한 싱글 중년여성(‘소다현의 극장에서’) 등의 인물을 통해 한줌 위로와 생애 배역의 한뼘 확장이 필요하다, 가능하다, “저기 봐라”(‘마법사들’, 윤성희) “여기 있다”(‘믿을 수 있나요’) 넌짓 들려줄 뿐이다.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은 7년 전 국내 언론과 한 대담에서 “삶은 (때로) 꿈 같아 어느 순간 내가 찍었던 영화도 (꿈을 잊듯 내가 만든 사실을) 잊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농담한 바 있다. 그런 그가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 참여해 남긴 말이 “어린 시절 영화관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나를 찾아와 마치 오래전 따뜻했던 추억을 속삭이듯 내 영혼을 뒤흔들곤 한다.” 영화보다 극장인가. <캐스팅>엔 이 시대 더 필연적인 극장의 ‘사연’들이 자박 담겨 있다. 소읍의 문 닫는 극장이 스스로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안녕, 장수극장’, 박서련)까지. 코로나 팬데믹으로 극장은 더 야위고 바투 극장이란 말도 사라지므로 작정하고 꼽은 책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돌베개·채널예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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