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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거리 두고 ‘있는 그대로’…에르노의 임상적 예리함

등록 2022-10-21 05:00수정 2022-10-21 14:21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
계급 이동에 따른 부끄러움 직시

부르디외 사회학 떠올리게 하면서도
자신에게도 거리 두는 글쓰기

·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l 문학동네 l 1만원

·  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l 1984북스 l 1만5500원

·  빈 옷장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l 1984북스 l 1만4500원

·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l 1984북스 l 1만2000원

올해 노벨문학상은 아니 에르노(82)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가 젠더와 언어, 계급을 비롯한 불공평한 삶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는 점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자신의 불륜 경험을 고백한 <단순한 열정>을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으로 기억하는 독자라면 한림원의 평가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회적 계급 분할이 삶의 가장 깊숙한 곳에 무의식과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쳐 온 작가였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세살 때 고향을 떠나 사립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출신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만드는 세련된 교양의 세계를 대면하게 된다. 값싼 술을 시켜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마시는 지방 하층 노동계급의 세계에서 우아한 상층 계급 출신 선생님이 가르치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세계로의 이동은 그녀가 최초로 겪은 사회적 상승 이동이었다. 이후 루앙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교사 자격증을 획득한 그녀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 남성과 결혼한 뒤 프랑스 국립원격교육원의 교수가 되면서 계급적 상향 이동의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19년 9월20일 스페인에 있는 한 호텔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EPA 연합뉴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19년 9월20일 스페인에 있는 한 호텔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EPA 연합뉴스

그녀는 초라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그 여정을 익숙한 ‘출세담’으로 채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계급 이동 과정에서 끊임없는 부끄러움에 시달렸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의 실체를 고유한 글쓰기 형식을 통해 마주하려 했다. 이때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인류학적 연구는 그녀에게 큰 영감을 준 지적 자원이 되어주었다. 그녀가 정통 프랑스어로 행해지는 교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사용해 온 노르망디 사투리를 낡고 추한 것으로 취급할 때 받은 상처를 고백하거나 아직도 파리의 6구나 7구에 가면 사람들의 옷차림과 길을 걷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문화자본, 상징폭력, 아비투스 같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용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는 그녀가 공들여 쓴 글이 부르디외가 내놓은 사회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환원될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와 대담을 나누었던 이사벨 샤르팡티에는 이 위험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점에서 당신의 글쓰기 기획이 사회학과 구별되는 건가요?” 이에 맞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쓰기는 무엇보다 그 형식에 있어 사회학과 구별된다고 답한다. 실제로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는 형식의 측면에서 독특한 면모를 띤다.

그 형식적 독특성은 무엇보다 서술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서 생겨난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겪은 일만 쓰는 ‘오토 픽션’ 작가로 불린다. 작가와 화자, 인물이 일치하는 ‘오토 픽션’의 성패는 이 서사의 세 요소가 얼마나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는지에 달렸다고 간주된다. 그 셋이 거짓과 조작 없이 밀착될수록 진실성의 순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는 끊임없이 글 쓰는 자신과 글에 등장하는 자신을 분리시킨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진실’이 아니라 ‘사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인 자기 자신을 특권적으로 초점화하지도 않는다. 초점화자에 집중되는 나르시시즘적인 에너지가 희미하다 보니 그녀의 글을 읽으면 초점이 계속해서 이동하고 부유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흐릿한 거리감은 그녀의 글을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플롯의 전개가 아니라 파편적인 기억과 상념의 무수한 연쇄로 느끼게 만든다.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 스웨덴 한림원 누리집 갈무리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 스웨덴 한림원 누리집 갈무리

아니 에르노는 부모님의 삶은 물론이고 자신이 겪었던 계급 분리의 현실, 문화적 차이, 심지어 여성이었던 자기 자신까지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그녀는 자아의 ‘소격 효과’라고 부를 수 있는 건조하고 단조로운 글쓰기를 통해 그녀 자신만의 독특한 재현의 윤리를 구축해 나간다. 그녀는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가 야기하는 일상적 차별의 양상을 예리하게 인식하지만 계급주의와 민중주의라는 익숙한 정치적 관점으로부터 거리를 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려 했다. 아버지에 대해 쓸 때 밑바닥 계급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 탐닉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민중의 건강함과 위대함을 상찬하는 태도와도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했다는 고백에서 그녀의 염결한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단순히 자신의 비천한 ‘출신 성분’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이는 그 비천한 세계에서 자기 자신만 빠져나왔다는 모종의 죄책감에서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유명한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마지막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에서 “주체로서 한 사람이 지닌 고유성은, 궤도 이탈의 결과로 생긴 자신과의 불일치를 어떻게 메우려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궤도 이탈’이 근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관철되는 삶의 조건이라면, 아니 에르노가 고백한 부끄러움과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이 느꼈던 부끄러움은 상당 부분 겹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양상은 국가, 지역, 시대, 인종, 젠더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아니 에르노가 고백해낸 자신의 계급적 차별의 경험을 한국 사회의 현실과 거듭 교차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세계문학이 그렇듯 아니 에르노의 작품 역시 ‘지금-여기’와 관련지으며 읽을 때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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