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통계·현장 아우르며
돌봄의 ‘비가시성’ 뿌리 추적
돌봄은 환자의 존엄 지켜주려
끝없이 그의 ‘선’을 넘는 예술
돌봄의 ‘비가시성’ 뿌리 추적
돌봄은 환자의 존엄 지켜주려
끝없이 그의 ‘선’을 넘는 예술
돌봄노동에서 ‘접촉’은 때로 언어 이상의 역할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정, 병원, 시설, 임종의 침상 곁에서, 돌봄과 관계와 몸의 이야기
매들린 번팅 지음, 김승진 옮김 l 반비 l 2만2000원 돌봄은 상대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수시로 ‘선’(線)을 넘는 작업이다. 돌보는 자는, 돌봄 받는 자가 자신의 배설물로 인해 모멸감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장 사적인 신체 부분까지 수시로 침범한다. 돌봄은 또 “환자에게 주도권을 내주면서도 통제력도 유지해야 하는” 일이다. 극도로 흥분한 환자가 시급한 치료를 거부할 때, 돌봄 제공자는 때로 강제력을 동원한다. 돌봄의 본질, 특성, 양태를 가까이서 살펴볼수록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칙은 자주 모순되고,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사랑의 노동>의 지은이 매들린 번팅이 돌봄을 “복잡계의 영역”이라고, “기술인 만큼이나 예술이며, 요령인 만큼이나 전문적인 역량”이라고 정의한 이유다. 그러나 고도의 판단력과 섬세한 관찰력, 상당한 인내력을 요함에도, 돌봄은 줄곧 ‘비가시화’ 되었고, ‘비천하게’ 취급됐으며, 그 의미마저 ‘빈약’해져 왔다. 이 책은 “돌봄의 비가시성과 가치 절하의 오랜 역사”를 추적했다. 영국 <가디언> 부편집장을 지낸 저자는 5년 동안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병원, 민간 간병 서비스 업체, 장애인 지원 시민단체 등 돌봄 현장을 찾고, 수많은 문헌과 통계를 뒤지며 돌봄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문화적 가림막’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 가림막에 짓눌려 존엄을 상실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돌봄노동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돌봄이 과거 ‘가내 하인(녀)’의 몫이었던 데서 기인한다. 이들은 최대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육아, 간병 등 각종 돌봄을 수행하도록 훈련받았다. 이러한 역사는 돌봄이 “여전히 저숙련 노동, 무료이거나 값싼 노동”으로 인식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가내 하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돌봄은 이제 아내의 몫이 됐다. 돌봄은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가정은 시장경제가 침범하지 못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주입되면서 돌봄은 또다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돌봄 ‘후려치기’는 이어졌다. 공공부문 민영화로 돌봄에도 효율성·생산성 잣대가 적용되면서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상호신뢰, 소통과 같은 돌봄의 인간적 부분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돌봄이 ‘서비스’로 자리 잡으면서 문화적 의미가 완전히 말라버렸다. 지은이는 오늘날 돌봄은 “반(反) 문화적인 무언가”가 되었다고까지 진단한다. “돌봄에는 자신의 욕망보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하는 자기희생을 발휘할 것이 요구되므로, (돌봄은) 자아의 욕망과 실현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대한 저항이 필요한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보상, 문화적 의미 측면에서 돌봄노동이 겪는 이 빈곤화를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까. 고령화, 장기질환자 증가로 돌봄 수요는 폭증하지만 영국의 돌봄 인력은 매년 “절반이 이탈하고 있다”. 저자는 “돌봄에 대한 충분한 임금과 적절한 노동조건이 필수적이지만, 돌봄을 인간관계의 선물로 보는 문화적 프레임 또한 필수적”이라고 짚는다. 돌봄이 마치 화폐처럼 사회 곳곳에서 막힘없이 “돌고 돌게” 하려면, 화폐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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