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 명예교수
김형국 교수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박경리 작가.
<박경리 이야기> 표지.
1983년 원주 자택 방문 ‘문하생’ 인연
1994년 ‘토지’ 완간 기념행사 위원장
말년 토지문화관 건축위원장도 맡아 생애·문학 정리 ‘박경리 이야기’ 내
“불운·고통 ‘문학’으로 승화시킨 분” 책에는 작가의 인간적 약점이라고 할 만한 내용도 나온다. “피해의식이 강했다고 할까요. 토지문화관 공사를 마무리할 때인데요. 당신의 개인 집에 심은 소나무는 90만원에 샀는데 문화원 앞 소나무는 110만원이라면서 분노하시더군요. 업체가 돈을 빼먹는다는 의심이었죠. 이 말을 공사 소장에게 전하니 대기업이 물품을 납품받을 때는 10% 부가가치세를 내야 하니 개인 거래보다 돈이 더 들어간다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김 교수가 <토지>에 빠진 데는 역사책에서 접하기 힘든 20세기 전반 한반도 민초의 삶이 생생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소설에 나오는 경남 남해안 사투리였단다. 경남 마산(현 창원) 출신인 그는 <토지>를 수놓은 사투리를 보면서, 지방 말도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단다. “1960년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 오니 지역 차별이 있더군요. ‘경상도 새끼, 전라도 놈, 평안도 치’ 같은 말을 많이 들었죠. 유교문화가 강한 경북 사람들도 밀양과 경주 아래 경남 사람들을 부를 때 ‘하도 사람’이라고 했죠. 아랫것들이란 말이죠.” 그는 “같은 사투리를 쓰는 동향이라는 점이 작가와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면서 말을 보탰다. “작가와 처음 만났는데 저와 말투가 거의 같더군요. 제 모친도 평생 저한테 ‘흥극’이라고 했는데 작가도 첫 손주(김원보)를 ‘은보’라고 부르더군요.” 그는 ‘박경리 문학’을 탐구하면서 그 원천에는 굉장한 독서력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단다. “작가의 어머니가 딸을 ‘구멍 지기’라고 불렀답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책만 읽었다는 거죠. 작가 신혼 때도 이웃들이 ‘저 집에 새댁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토지>에 나오는 강 포수의 걸쭉한 음담패설을 보면서 ‘얼마나 책을 읽었으면 이런 표현이 나올까’ 감탄했죠.” 박경리의 문학 자질은 어디에서 흘러 어디로 갔을까? “작가 어머니가 <숙영낭자전> 같은 옛 소설을 많이 읽으셨고 동네 사람들 모임에도 불려 가서 여흥으로 소설 암송을 했답니다. 이야기꾼이셨죠. 그 자질은 어릴 때부터 빼어난 그림을 그린 외손주 원보씨에게로 흘러갔다고 봐야죠.” 대작가와 교류하면서 받은 가장 큰 영향이 뭐냐고 하자 “저도 그분과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책을 자평해달라는 질문에는 “박경리 연구자들에게 박경리의 기초적 인격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그런 품은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답했다. 2014년부터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저자는 고 장욱진 화가와 김종학 화가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문학과 미술의 대가들한테 발견되는 공통점은 뭘까? “세운 뜻에 대한 집념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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