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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전령’ 50주년 “시는 날 버린 적 없다”

등록 2022-09-30 14:28수정 2022-09-30 21:14

정호승 시인, 14번째 신작시집
“등단 50주년 기념 의미 커”

‘떨어짐’에서 ‘텅 빔’으로 인고해
“죽음 통한 이별 수긍해야 할 때”
슬픔이 택배로 왔다

정호승 지음 l 창비 l 1만1000원

어떤 직유나 직설은 은유보다 더 은유적이다. 시인 정호승이 그렇다. ‘쉬운 시’를 표방해온 그의 언어는 기도문처럼 간명해 보이다가도 지금 시는 시심대로 읽히고 있는지, 읽은 길을 잃은 길인 양 되돌아보게 한다. 피할 수 없는 노릇. 쉬운 시가 쉬이 쓰인 시일 리는 없고, 무엇보다 진솔의 깊이 탓이다. 새 시집과 함께 등단 50주년을 맞아 지난 29일 저녁 마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북토크도 시종 솔직하여 독자는 숙연해지다 또 웃었다. “이미 쓰인 시는 독자의 것”이라 작가는 말하나, 에두르지 않으므로 더 삼가게 된다.

“마음이 다 떠났다/ 마음에도 길이 있어/ 마음이 구두를 신고/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버렸다/ 비가 오는데 비를 맞고/ 눈이 오는데 눈을 맞고/ 마음이 먼 길을 떠난 뒤/ 길마저 마음을 다 떠나버렸다/ 나는 마음이 떠나간 길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종로에서 만나 밥 먹을 마음도/ 인사동에서 만나 술 마실 마음도/ 기차를 타고 멀리/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마음이 다 떠나면/ 꽃이 진다더니/ 내 마음이 살았던 당신의 집에/ 꽃이 지고/ 겨울비만 내린다” (‘마음이 없다’ 전문)

마음이 떠나는 길, 더는 따라갈 마음이 없는 길은 ‘죽음’처럼 내가 나와 작별하는 길일 것이다. 도리 없이 쓸쓸하고 비극적인 길, 이윽고 두려운 길이리라.

1972년과 73년 동시와 시로 연이어 신춘문예 등단한 이래 지금껏 13권의 신작 시집을 낸 정호승의 시적 생애, “이번 시집은 올해 등단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의미가 크다”는 ‘시인의 말’(<슬픔이 택배로 왔다>)대로라면 종착을 향한 탐찰의 기운이나 온도는 짐작할 만하다.

실제 시집 전반에서 시인은 죽음의 응시를 숨기지 않는다. 아니, 이처럼 드러내는 적은 지금껏 없었다. “빈집이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난다/ 집을 떠나야 내가 빈집이 되므로/ 빈집이 되어야 내가 인간이 되므로/ 집을 떠나면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나의 빈집에는 이제 어머니도 나도 없다/ 나의 빈집은 바람이고 구름이다”(‘집을 떠나며’ 부분)

“한번은 꼭 닫아야 한다/ 한번은 꼭 닫힌 후 열리지 않아야 한다/ 열리지 않고 썩어야 한다/(…)/ 모든 뚜껑은 열리기 위해 어둠 속에 닫혀 있으나/ 관 뚜껑은 닫히기 위해 아침부터 반쯤 열려 있다”는 시 ‘관 뚜껑에 대하여’는 어떤가.

이쯤서 되돌아보면 “꽃이 지고 겨울비만 내”린다는 빈집도 “바람”과 “구름”의 이치일 뿐이라 울고 말고, 두렵고 말고의 연유가 없다. 시인 정호승에게 슬픔이 소명이고 비극이 현실이라 그러한 건 아닌 듯하다. 외려 종착으로의 길 위에서 기다리고 용서하고 슬픔도 비극도 품어내며 이제 종내 스스로 길이 되려는 ‘윤리적 서정’에 그 답이 있다. “먼 데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당신을 가장 기다린다”는 ‘빈 의자’, “빈 물통엔 늘 물이 가득 차야만 되는 줄 알고/ 평생 물을 가득 채우다가 빈 물통을 껴안고/ 슬픔에 목마른 날이 많았다// 나는 이제 빈 물통으로 물을 마셔도 목마르지 않다”는 ‘빈 물통’ 등 ‘공’(空·빌 공)의 여러 시제로 유추되는 바.

작가는 북토크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통한 이별을 택배로 받아볼 수밖에 없고, (이때의 슬픔은 이제) 긍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표제시 ‘택배’가 쓰인 경위다.

끝끝내 비루한 욕망의 세계에서 이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시인의 길(방도)은 ‘낙’(落·떨어질 낙)이라 해야겠다. “바쁘나 내가 니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 그런데 니가 너무 바빠서/ 말끝을 흐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늙은 눈물이다”(‘낙수’)를 기억하여, 임종을 놓쳐 회한으로 사무친 “나의 구근” 어머니가 “땅에 묻”혀 거듭 “구근이 된” 일(‘구근을 심으며’)과 같이,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낙과’)이라 각오하는 일이다. 스스로 흙이 되고 길이 되는 데서 새 생명과 새 인연이 가능하므로, 때로 슬픔은 비극이 아닌 셈이다.

정호승 시인이 29일 저녁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등단 50주년 출간기념 북토크’에서 50여명의 독자 청중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 창비 제공
정호승 시인이 29일 저녁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등단 50주년 출간기념 북토크’에서 50여명의 독자 청중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 창비 제공
정호승 시인이 29일 저녁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등단 50주년 출간기념 북토크’에서 50여명의 독자 청중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 창비 제공
정호승 시인이 29일 저녁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등단 50주년 출간기념 북토크’에서 50여명의 독자 청중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 창비 제공
대개 저녁을 거른 모양으로 ‘등단 50주년 출간기념 북토크’를 찾은 50여명의 독자 청중에게 “15년 넘게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은 기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시를 버렸는데 시는 날 버린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여생 더 많은 시를 짓겠다는 복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사이사이 ‘택배’와 ‘낙과’ 그리고 그가 “가장 기뻤다”고 한 1978년 첫 출간 시집의 표제이자 대표 시로 간주되는 ‘슬픔이 기쁨에게’를 낭송했다. 시 세 편으로 오랜 시력이 추려질 리 있겠는가만, 시인이 시를 외면했을지언정 반세기 슬픈 현실을 외면하진 않았음을 증거하기엔 더덜없다.

“사람은 지는 꽃을 따를 때/ 가장 아름답다”(‘꽃을 따르라’) -“꽃이 질 때 너도 나와 아름다워라”(‘매화불’, 각기 부분)

‘늙은’ 슬픔의 전령은 이제 슬픔이 되어 슬픔을 말하려는 까닭이라, 두 시(20~21쪽) 사이에 이 가을은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후기 시의 사지가 비틀리고 절단되는 세계라니…

29일 북토크에서 좌중은 특히 놀랐다. 제목, 어구, 작가 이름까지 뒤틀린 채 시들이 복사되고 범람하는 웹 세계에 대한 정호승의 솔직한 토로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시는 90%가 파괴된 거예요. 제목 ‘강변역에서’가 ‘강변옆에서’, ‘밥그릇’이 ‘개밥그릇’이 되어 있어요. 누군가 판각을 선물해줬는데 시구가 틀렸고, 강연 때 한 학생이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의 (패러디) 시를 읽어요, 하! 속이 상해서….” 시인은 “인터넷 시대 가장 피해를 본 장르가 시예요. 진정한 독자는 원문을 찾아 읽어주길 바랍니다” 당부했다. 밤 8시40분께 ‘시인 앞에서 시의 사지를 비틀고 절단하는 세계는 어떤 슬픔일까’ 씁쓸한 뒷맛으로 행사장을 나올 때, 허기졌을 청중들은 챙겨온 책들을 들고 기다리며 그 시와 자신의 인연을 또 시인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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