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인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l 비채 l 1만4800원
신간 <지구별 인간>으로 한국 독자들과 만나는 일본 작가 무라타 사야카. ©Shinchosha
23일 시작한 ‘2022 서울국제작가축제(SIWF)’에서 한국 독자들과 만나는 일본 소설가 무라타 사야카(43)의 새 소설 <지구별 인간>이 때맞춰 한국에서 출간됐다. 2003년 데뷔 때부터 주요 문학상을 석권하며 일본 문단에서 빠르게 성장한 무라타 사야카는 2016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편의점 인간>으로 일본 밖에서도 주목받는 작가 대열에 올라섰다.
<지구별 인간>은 우리가 ‘보통’이나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기준에 질문을 던지는 <편의점 인간>의 문제의식을 잇는다. 하지만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더 도발적이고 문학적 형상화는 리얼리티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제목 속 ‘별’이라는 말의 낭만적 어감과 ‘세일러 문’을 떠올리게 하는 요술봉 그려진 핑크빛 표지는 하나의 트릭이라고 할 만큼 전개되는 활자들은 시종 어둡고, 질주하는 상상력은 끝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주인공 초등학교 5학년 나쓰키는 마법소녀다. 외계행성에서 지구행성에 온 퓨트-“겉보기엔 새하얀 고슴도치 인형이지만”-가 준 요술봉과 콤팩트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됐다. “내가 없으면 셋은 진짜 가족처럼 보이”는 엄마 아빠와 언니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촌 유우에게만은 자신의 비밀을 고백할 수 있다. 유우는 자신이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버린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쓰키의 마법은 엄마의 일상적 언어폭력과 짜증이 임계점을 넘어가면 사정없이 날아오는 매질을 견뎌야 할 때 발휘된다. 또 엄마의 방기와 언니의 외면 속에서 학원 선생님에게 성적 학대를 당할 때 고통을 잊기 위해 유체이탈의 마법을 쓴다. 유우 역시 몇 년 전 이혼한 뒤 자신에게 애인처럼 의지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엄마 때문에 제 나이의 기쁨을 누리고 살지 못한다. 마법과 외계는 반항하면 버려질 것이라는,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공포가 만든 마음의 피난처인 셈이다. 1년에 한번 여름 명절에 만나는 서로가 유일한 안식처인 둘은 결혼하기로 하고 함께 다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지구별 인간>에서 아동폭력은 중요한 모티브다. 하지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아동폭력이라는 현상 그 아래 있는 가족제도의 폭력성을 향한다. 작가는 나쓰키의 입을 빌려 이 세상을 ‘공장’이라고 말한다. “내 자궁은 이 공장의 부품이며, 마찬가지로 부품인 누군가의 정소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할 것이다.” 부품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의지가 없는 이들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다. 나쓰키는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공장 부품으로서의 존재가치에 순응하면서 기계처럼 사는 어른들의 삶이 역겹다. “아이를 성욕 처리에 이용하면서, 아이가 자기 의지로 섹스를 하면 멍청이처럼 난리법석을 떠는” 게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섹스를 하려다가 어른들에게 들켜 유우와 강제로 헤어진 나쓰키의 이십삼년 뒤로 훌쩍 넘어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나쓰키는 “계속되는 징역 속에서 공장의 부품이 되라는 강요에 시달”리다 해결책을 찾아냈다. 세간의 시선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완벽한 파트너, 자신처럼 “완벽한 세뇌에 실패한” 남편을 만난 것. 둘 다 이성애자이지만 각자의 이유로 섹스를 거부하는 나쓰키와 남편은 결혼을 하고 한집에서 독립된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당하는 아이 나쓰키와 성인이 되어서도 ‘세뇌’와 저항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쓰키를 통해 전작들보다 젠더적 관점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공장’은 여전히 그에게 부품으로서의 기능을 강요한다. 어릴 때 자신처럼 겉도는 부적응자였던 언니도,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마저 결혼과 출산이라는 제도에 기꺼이 순응한다. 그리고 “상식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인간은 타인을 심판하게 된다.” 순응자들은 곧 심판자가 되어 끊임없이 떠보고 의심하고 압박하고 비난한다.
<지구별 인간>은 현실에 밀착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판타지와 에스에프적인 특징이 이야기 곳곳에 ‘마블링’되어 있다. 이는 민감한 소재와 파괴적 상상력의 질주를 완충하는 기능적 측면도 있다. 어린 나쓰키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학원 선생님에게 위협을 느끼고 도움을 청하지만 엄마마저 무시하자 한밤에 선생님 집을 찾아가 깊이 잠든 그를 죽인다. 이 장면에서 소설은 갑자기 핑크색과 파란색, 황금색의 마법이 난무하는 환상 소설로 도약한다. 아이가 어른의 죄를 직접 응징한다는 도발적인 상황에 대한 문학적 해법이면서 한편으로 실제 극한의 고통에 놓인 아이들이 환상을 만들어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어기제처럼 보이기도 해 독자의 마음을 찌른다.
남편이 일곱번째 직장에서 잘린 뒤 시골에 가고 싶다고 매달리면서 부부는 유우와의 사건이 있던 시골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유우는 어린 시절의 몽상에서 벗어나 냉정한 현실로 돌아왔지만 나쓰키 남편의 끈질긴 설득으로 세 사람은 지구별 사람들이 세워놓은 상식과 규칙을 부수는 실험에 나선다. 의식주를 구성하는 모든 통념에 질문하며 이들이 꾸려가는 삶은 흔히 떠올리는 자연 속의 목가적인 삶이 아니다. 작가는 독자를 시험하듯 어디까지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인지 집요하게 질문과 도발의 강도를 높여간다. <편의점 인간>이 대학 때부터 수상 당시까지 18년 동안 편의점 직원으로 일해온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란 사실로 화제가 됐던 무라타 작가는 일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지구별 인간>에 자신이 자란 마을을 무대로 유년 시절부터 고민해온 문제의식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내한하는 무라타 작가는 서울 중구 명동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24일 하성란·김멜라 작가 등과 낭독회(오후 6시)를 열고 25일에는 강화길 작가와 대담(오후 4시)을 펼칠 예정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