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김경욱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4000원
소설집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를 발표한 김경욱 소설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그분이 오셨나 봐?” 아내가 물었지만, 그분은 오지 않았다. “두해째 개점휴업 상태”인 소설가 이야기다. 데뷔 이후 30년 동안 18권의 책을 오롯이 묶어 낸 김경욱 작가에게도 “단 한 줄, 단 한 단어도 써지지 않는 때”가 있었을까?
이번에 발표한 아홉번째 소설집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수록작 ‘그분이 오신다’는 글이 써지지 않는 소설가의 괴로움을 그린 작품이다. 이 역시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소설’이지만 자신을 직접 드러내는 에세이 한권 내놓지 않은 작가인지라 숨겨뒀던 작가의 맨얼굴을 보는 듯한 재미가 물씬하다. 글은 써지지 않고 ‘이것도 소설이냐, 베어진 나무만 불쌍하다’는 온라인 한 줄 평만 가슴에 박힌 중년 작가는 이사할 집에 흉사가 있었다는 아내의 근심을 듣고 되레 창작의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흥분에 설렌다.
하지만 작품에서 작가의 맨얼굴을 본 듯한 즐거움은 곧 사라진다. 마지막 수록작 ‘이것은 내가 쓴 소설이 아니다’에서 작가는 ‘그분이 오신다’가 자신이 쓴 작품이 아니라고 반박하기 때문이다. 보고서 형식으로 쓴 이 단편에서 소설가 A씨는 동료로부터 ‘절대 안 쓴다던 소설가 소설이라니, 헐’이라는 문자를 받는다. 자신도 모르는 신작이 실렸다는 잡지를 찾아보니 “소설 말미에 적힌 프로필마저 본인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창작수업을 받은 작가 지망생의 사기행각을 의심하지만 도무지 실마리를 찾아낼 수가 없다.
작가는 휴면 상태인 ‘페이스북’(페북)에 공개 수배를 한다. “제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한 분은 하루 빨리 자수하여 광명 찾기를 권합니다. 눈 밝은 독자분들은 주변에 범인으로 의심되는 분이 있으면 주저 말고 제보 바랍니다.” 인기 없는 작가의 페북에는 가뭄에 콩 나듯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지만 온라인 한 줄 평 못지 않은 조롱 글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댓글 놀이의 화력은 점점 세지고 작가가 내놓는 위작의 근거는 네티즌 수사대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논거들에 밀리면서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엉뚱하게도 빛바랜 작가의 이름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기묘한 순기능이 되어버린다.
두 작품은 소설가가 무대 위로 자신을 올려놓으면서 ‘맨얼굴’-나-을 드러내는 행위란 무엇일까,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맨얼굴이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반문을 핑퐁처럼 주고 받는다. 녹록치 않은 주제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매끄럽고 기지 넘치게 풀어나가는 화법은 30년 동안 끈질기게 빈 문서창을 응시해온 중년 작가의 필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