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부터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개최된 IBBY 국제총회에서 6일 저녁(현지시각) 안데르센상을 수상하는 이수지 작가. 오른쪽은 장밍저우 IBBY 회장, 왼쪽은 준코 요코다 현 안데르센상 심사위원장. KBBY 제공
전세계 가장 큰 규모로 아동·청소년 문학 관계자들이 집결하는 국제행사에서 한국 아동문학 작가들이 각국 청중들의 환호와 함께 주요 세션을 구성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국내 저조한 관심이나 시장성과 달리 호명되는 한국 작가들의 수준과 우리 아동문학이 나아갈 바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했던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이하 이비) 국제총회 2022’다.
‘이야기의 힘’을 주제로 지난 5일부터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개최 중인 이 행사에서 한국의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백희나와 이수지, 동화작가 이현 등이 각자 다른 색깔과 깊이 있는 존재감으로 37개국 300명가량의 참가자들과 만났다. 이비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1956년 제정)을 관장하는 등 아동출판물 확산과 교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단체(80개국 가입)로, 국제총회가 2년 주기로 열린다. 이 총회는 세미나, 전시, 비공식 네트워크 모임 등의 행사가 가장 큰 규모(국제도서전 제외)로 전개되며 아동문학·출판의 현주소와 방향을 짚는 가늠자 구실을 한다.
지난 5일부터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개최된 IBBY 국제총회에서 6일 오후 백희나 작가(오른쪽)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알마)상 심사위원인 에리나 드루커(스웨덴 스톡홀름대 교수)가 대담을 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거울속으로> <파도야 놀자> 등의 이수지 작가는 2022년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 수상자(선정 결과는 지난 3월 이탈리아 볼로냐도서전에서 발표)로서 6일 저녁 8시(현지시각) 공식 수상을 통해 자신의 작품관과 수상 소감을 밝혔다. “가장 창의적이고 유희적인 독자를 가진 게 그림책”이라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세계와 온몸으로 부딪히며 만나는 아이들에 대한 경외와 감탄의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림책을 만든다”는 이 작가는 끝말 대신 최근작 <여름이 온다> 속 흥과 격정 넘치는 아이들 그림에 비발디의 ‘여름 3악장’을 배경음악으로 들려줘 갈채를 받았다. 이 작가는 이를 “특별히 (올해 글 부문 안데르센상을 받은) 마리오드 뮈라유 작가에게 바친다”고도 말해 웃음을 줬는데, 뮈라유는 앞서 수상소감에서 “(제 에코백에) 책 두권이 있는데 (한권을 내보이며) 이게 이수지 작가한테 사인 받은 책”이라며 자신을 “이수지 팬”이라 말한 바 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생애 순간순간을 동화처럼 들려주며 “스토리는 슬프게도 현실”이라며 무대 위에서 울고 웃었다.
5~8일 열린 IBBY 국제총회의 1층 전시장에 마련된 자신의 책 코너에 선 이수지 작가. KBBY 제공
일정상 좌중의 첫 환호는 6일 오후 <달 샤베트> <알사탕> 등을 펴낸 백희나 작가에게 쏟아졌다.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말괄량이 삐삐>의 작가를 기려 제정된 상으로, ‘알마상’으로도 불림) 수상 이후 처음 오프라인 행사에 선 백 작가는 알마상 심사위원인 엘리나 드루케르 스톡홀름대 교수와 대담을 통해 작업 방식, 창작관 등을 청중과 나눴다. 너나없이 “빅팬”이라는 각국 질문자들에 대한 답변까지 아울러 백 작가는 “어떤 스토리 구상에 10년이 걸리기도 했다. 일정 분량의 노력과 시간이 영감이고 재능이다. 알마상이 더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는 아티스트보다 엔터테이너로 독자인 아이들을 행복하게, 웃게 슬프게 공감하도록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비가 국제총회에서 알마상(2003년 제정) 쪽을 초청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대담 뒤에도 백 작가에게 달려가 질문하고 사진을 찍겠다는 이들로 주변이 붐볐다.
이번 IBBY 국제총회에서 주목받은 한국 작가 3인. 왼쪽부터 백희나·이수지·이현 작가. KBBY 제공
두 작가가 <한겨레>에 공히 강조한 것은 언어 습득 이전의 ‘놀이’ 권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책의 효능이다.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정수”로서의 “어린이성”(이수지 작가)을 탐구하고 재현하는 이들로서, “한국 그림책 작가는 세계 반열에 이미 섰다”는 평가(김서정 아동문학평론가)를 넘어 선도적 기세를 국제 무대가 확인시켜준 것이다. 알마상 수상이 국내 최초인 것은 물론,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 수상은 1984년 일본 안노 미쓰마사 작가에 이어 아시아에선 38년 만의 영예다. 과거 네차례 안데르센상 심사와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그림책 상인 콜더컷(칼데콧)상의 위원회 의장(2015년)도 맡았던 준코 요코다 현 안데르센상 심사위원장은 <한겨레>에 “볼로냐도서전에서 한국 작품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게 십수년도 더 됐다”며 한국 작품들의 특징을 “대단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이수지 작가는 7일 ‘이미지의 놀라운 힘’이란 주제의 전체 세션에서도 6m 길이로 펼쳐지는 자신의 작품 <물이 되는 꿈>을 중심으로 독특한 창작 경위와 지향점을 소개해 박수를 받았다.
5~8일 열린 IBBY 국제총회의 1층 전시장에 마련된 자신의 책 코너에 선 백희나 작가. KBBY 제공
이수지 작가는 안데르센상 선정 뒤 한 국내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그림도 직접 그렸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정도로 아동문학에 대한 이해가 척박한 한국이기에, 작가들이 구축한 입지는 각고의 뒷얘기들을 숨기고 있다. 한국어라는 폭을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허물어 세계 독자의 보편적 접근을 이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에 반해 동화 쪽에선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2000년) 이후 국제적 시선을 모은 작가·작품의 흐름이 선명하지 않은 편이다. 안데르센상 글 부문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2차례)과 중국에 견줘도, 번역 등의 기반과 지원이 작가들의 역량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5~8일 열린 IBBY 국제총회의 1층 전시장에 전시된 자신의 책을 들고 선 이현 작가. KBBY 제공
지난 5일부터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개최된 IBBY 국제총회에서 7일 오후 한 선택세션을 통해 자신의 책 <1945, 철원>과 의미를 설명하는 이현 작가. 임인택 기자
이런 결핍은 이현 작가가 메웠다. 이 작가는 안데르센상 심사위의 (번역) 추천도서에 <1945, 철원>(2012년)이 선정된 것을 계기로 7일 오후 열린 선택 세션에서 이 작품에 대해 “한국전쟁의 원인, 가정, 결과가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 도시와 나라를 소재로 평화의 의미를 나눠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분단국가로 간주되는 키프로스에서 온 문학 교사 차랄름보스 드미트리는 <한겨레>에 “우린 젊은 세대나 문학에서도 (튀르키예에 크게 의존적인 키프로스를 두고) 통일이나 평화를 더이상 얘기하진 않는다. 그냥 남과 북이 다른 국가가 됐다”고 말했다. 지극히 한국적 스토리텔링으로 이현 작가와 공감대가 형성되는 지점이다.
이현 작가는 “안데르센상 심사위의 번역 추천도서에 뽑힌 것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 어린이문학을 함께해온 분들의 박수가 더 뜻깊다”고 말했다. 이 작가의 <푸른 사자 와니니>는 한국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KBBY·이비의 한국 지부)가 올해 안데르센상 글 부문 후보로 추천한 바 있다. 1997년 합류해 이비의 ‘산 역사’로 간주되는 리즈 페이즈 사무국장은 <한겨레>에 “이번 국제총회는 지난 기간 한국 아동문학의 중요성이 어떻게 커져 왔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올해 이비 국제총회의 세부 주제와 발언의 상당은 코로나 팬데믹, 폭력, 전쟁, 기후위기 등에 따른 ‘위기의 아이들’과 책(어린이문학·출판)의 접점을 향한다. 장밍저우 이비 회장은 “아이들이 세계 어디에 있든 우리의 관심과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세계의 위기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제적 이해가 평화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지난 5~8일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개최된 IBBY 국제총회 1층에 이수지·백희나·이현 작가 등의 책을 포함해 마련한 도서 전시장을 메운 참가자들. 임인택 기자
이번 총회엔 한국 작가들의 활약을 전폭 지원해온 심향분 전 한국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회장(성균관대 선임연구원) 등이 참석했고, 안데르센상 심사위원이었던 이지원 번역가·작가, 말레이시아 국립도서관 책 기증 행사를 추진한 방동주 한국국제스토리텔러협회장 등도 7~8일 선택 세션 발표자로 참가한다.
변윤희 한국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회장(동명대 교수)은 “한국 아동문학이 세계를 선도하고 인지도 높은 작가들도 있는데 반해, 국제적인 연결은 이번에 총회를 연 말레이시아에 비해서도 부족하다”며 “더 많은 국내 작가, 작품들을 해외에 알리고 국외 시도들을 소개하는 기회로 삼아 다음 이비 국제총회의 한국 유치에 나설 방침”이라고 말했다. 성사가 된다면, 2024년 이탈리아, 2026년 캐나다 이후인 2028년에 개최가 된다. 지나치게 늦었으나 더는 늦출 수 없는 대회로, 내년 상반기 볼로냐도서전에서 그 결과가 나온다.
푸트라자야(말레이시아)/글·사진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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